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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유림단 사건을 이끈 이봉로·이용로 형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80036
한자 第二次 儒林團 事件- 李鳳魯 李龍魯 兄弟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97년 - 이용로 출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2년 7월 12일 - 이봉로 출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19년 6월 - 이용로 상해 독립운동 자금 모금 운동 전개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5년 - 이봉로 독립운동 자금 마련 해외 연락책으로 활동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30년 - 이봉로 신간회 대구 지회 교육 부장 재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32년 - 이용로 북경 한국 독립군 정보원으로 활동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0년 2월 22일 - 이봉로 사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9년 2월 - 이용로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 경상북도 위원회 위원으로 선출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60년 - 이용로 경북 피학살자 유족회 부회장으로 선출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63년 - 이봉로 대통령 표창 추서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0년 - 이봉로 애족장 추서

[정의]

일제 강점기 상해 임시 정부 독립운동 자금 모집에서 시작된 이용로, 이봉로 형제의 독립운동은 제2차 유림단 사건으로 확대되었고, 해방 후 친일 반민족 행위를 청산하기 위한 반민 특위 활동을 거쳐 경북 피학살자 유족회 활동으로 이어져 한국 근현대사의 맥을 이루었다.

[이용로의 국외 독립운동]

이용로(李龍魯)[1897~?]의 본관은 전의(全義)이며, 달성군 하빈면에서 태어났다. 일본 유학 중 도쿄[東京]에서 3·1 운동을 겪었다. 그 직후 독립운동의 최고 지도 기관으로서 임시 정부 수립이 추진되었다. 임시 정부 수립에는 많은 자금이 필요하였다. 1919년 6월 동아 예비 학교(東亞豫備學校)에 재학 중이던 이용로는 경상남도 합천 출신의 장인환(張仁煥)과 함께 임시 정부의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운동을 벌였다. 이로 인해 1917년 7월 15일 대구 지방 법원에서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재판을 받았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리되어 석방되었다. 1920년 일본 도쿄중앙 대학 법학과에 재학 중 재일 조선인 학생 기독교 청년회 사건으로 대구 형무소에 약 7개월간 구속되었다. 이로 인해 동교 1학년 재학 중 중퇴하였다. 그 후 고향인 달성군 하빈면 하산동으로 돌아와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이봉로의 유림계 독립운동 자금 모금 운동(제2차 유림단 사건)]

이봉로(李鳳魯)[1902~1940]의 본관은 전의(全義)이다. 그는 1916년 서울 중동 중학을 졸업하고, 서울 영어 학원을 수료하였다. 1924년 4월 중국 북경(北京)의 서성 공업 대학에 유학하였다. 1925년 김창숙(金昌淑)이 이회영(李會榮)을 만나 독립운동 방략에 대해 논의한 뒤 장기적인 관점에서 영남 유림을 대상으로 독립운동 기지 마련 자금을 모금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때 영주 출신 송영호(宋永祜), 봉화 해저리 출신 김화식(金華植) 등과 함께 김창숙의 뜻에 찬성하며 유림의 독립운동 모금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장기적 독립 투쟁을 기본 방향으로 설정하고, 먼저 중국에서 활동 중인 동지와 조선인 경제 문제를 해결할 것, 순차적으로 무장 실력을 양성하고 군인을 길러낼 것, 조선으로 진입하여 무력으로 독립을 쟁취할 것 등을 결의했다. 이에 따라 구체적으로 파리 강화 회의에 장서를 제출한 영호남의 유림 130명을 대상으로 20만원의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로 하였다.

이봉로는 해외 연락책을 맡아 중국 상해로 가서 정원(鄭遠)[정세호(鄭世鎬)]으로부터 무기를 구입하여 김창숙에게 전달하거나 김창숙, 송영호, 김화식 등 세 사람이 입국한 뒤 북경에서 북경 주변 정세를 탐문하여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유림의 독립운동 전개 중 중국 북경에서 체포되어 대구로 압송되었다. 1927년 3월 대구 지방 법원의 재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이봉로는 이 재판에서 재판장의 "조선 ○○[독립]에 대하여는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물음에 "물론, 찬성"이라고 대답하여 재판장을 놀라게 하였다. 1927년 7월 이봉로는 판결에 불복하여 공소하였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기각되었다. 같은 달 10일에 대구 복심 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대구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30년대 이후 두 형제의 독립운동]

이봉로는 유림계 독립운동 자금 모금 운동[제2차 유림단 사건]으로 출옥 후 민족 협동 전선으로 결성된 신간회 대구 지회에 가입하여, 1930년에 동회 교육 부장으로 활동하였다. 그 뒤 대구에서 이화(李華) 여관을 운영하였다. 여기에 대구의 독립운동가 이상훈을 비롯한 신재운, 김찬기 등이 자주 찾았다. 이용로는 일제가 만주를 침략한 뒤인 1932년 중국에 들어가 북경한국 독립군 정보원으로 활동하였다. 1940년 2월 이봉로는 고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정부에서는 1963년 대통령 표창, 1990년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해방 후 이용로의 반민 특위, 경북 피학살자 유족회 활동]

이용로는 1945년 해방이 되자 귀국하였고, 1948년 9월 22일 「반민족 행위 처벌법」이 제정되어 공포됨에 따라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이하 반민 특위]가 구성되었다. 1949년 2월 반민 특위 경상북도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위원장에 정운일, 위원에 송전도·방한상·이용로·정계환 등이 임명되었다. 이들 위원들은 일제 강점기 대구·달성 지역에서 민족 운동을 전개한 인물들이었다. 경상북도 반민 특위는 대구 동성로에 위치한 대구 지방 법원 소년부 지원에 사무실을 열고 활동을 시작하였다. 영장이 발부된 것이 30건에, 18건이 조사 완료되었다.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반민 특위 경상북도 조사관 활동에는 늦게 시작하였는데, 그가 조사한 친일 반민족 행위자는 조선 은행 대구 지점 폭파 사건의 장진홍(張鎭弘)을 탄압하여 유명해진 경상북도의 거물급 친일 경찰 최석현(崔錫鉉), 양산 농민 조합 사건을 조사한 친일 경찰 장자관(張子寬), 독립운동가 유시태(柳時泰)를 일제 경찰에 밀고한 혐의의 이인희(李麟熙) 등이었다. 그러나 반민 특위의 본래 목적이 실현되기 전에 이승만 정부의 반민 특위 해산 조치로 말미암아 친일 반민족 행위자의 처벌은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나자 사회의 다양한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그 가운데 한국 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대구·경상북도 지역에서 발생한 피학살자 사건의 희생자들을 발굴하고 가해자 처벌, 희생자의 명예 회복 및 보상을 위한 경북 피학살자 유족회 결성에 참여하여 부회장이 되었다. 당시 경북 피학살자 유족회의 피학살지 발굴 장소는 달성군 가창을 비롯해 화원, 월배 등이었고, 이 활동을 통해 한국 전쟁 전후 양민 학살 사건에 대한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그후 전국 피학살자 유족회의 결성을 추진하여 중앙 위원으로 활약하였다. 5·16 군사 쿠데타 이후 군사 혁명 재판에 회부되어 징역 15년형에 구형되었다가 무죄로 석방되는 고초를 겪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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