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808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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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賢壽 |
영어공식명칭 | Lee Hyeonsu |
이칭/별칭 | 삼광,일봉,우봉,장일봉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명곡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경상북도 달성군 화원면 명곡리에서 태어난 이현수(李賢壽)[1896~?]는 1917년 9월 무렵 독립을 위해 국외로 망명하였다. 중국의 상해, 광동(廣東), 홍콩 등지로 다니다가 1919년 3월 모친이 사망하자 귀국하였다. 모친상을 치르고 임시 정부 수립 소식을 듣고 다시 중국 상해로 건너갔다. 그는 상해 임시 정부의 재무부 서기로 활동하였다. 그 뒤 신흥 무관 학교에 교관 도인권(都寅權)을 통해 1920년 1월 입학하여 같은 해 7월 졸업하였다.
신흥 무관 학교를 졸업한 뒤 임시 정부로부터 조선에서 독립 선전 활동, 독립 공채 모집, 연락 기관 마련 등의 임무를 부여받았다. 또한 미국 의회 의원단의 조선 방문 때 조선의 독립 의지를 표명하라는 임무도 부여받았다. 이에 임시 정부 재무 총장 이시영(李始榮), 차장 유현진으로부터 독립 공채 증권 1,000원권 30매, 500원권 20매와 달성군 외 2군 공채 모집 위원 사령장을 수령하였다. 또 교통 차장 김철(金澈)에게 경상북도 교통 사무 특파원 사령장을 받았다. 이현수는 1920년 8월 10일 무렵 달성군 화원면 명곡리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자신의 집에서 등사판을 빌려 경고문, 『자유 신보(自由新報)』, 왜인 물품 불매 고지서, 납세 거절 협박문, 포고문, 유고문(諭告文), 독립 공채 모집에 관한 인정서 등을 직접 인쇄하였다. 이현수는 한글 인쇄물과 영문 인쇄물을 대구를 비롯한 경상북도 각 지역에 뿌리고, 대구를 비롯하여 평양과 전주의 선교사들에게도 발송하였다. 이러한 활동이 일제 경찰에 발각되자 1923년 9월 경상북도 경찰부에 자진 출두하였다. 그러나 일제 경찰의 가혹한 조사 끝에 관련자 42명이 적발되고, 그중 27명이 체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