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809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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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郭鍾海 |
영어공식명칭 | Kwak Jonghae |
이칭/별칭 | 곽영우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중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곽종해(郭鍾海)[1891~1946]는 1891년 2월 27일 경상북도 달성군 현풍면[현 현풍읍] 중동에서 태어났다. 1920년 8월 초순에 달성군 최초의 청년회인 현풍 청년회의 결성을 주도하고, 창립 총회에서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현풍 청년회의 주요 활동은 노동 야학을 통한 교육 기관 설립이었다. 1920년 8월 10일 무렵 상해 임시 정부에서 특파된 이현수가 항일 민족의식의 고취와 군자금 모집의 사명을 띠고 경고문, 최급 경고문, 포고문, 왜인 물품 불구매 고지서, 납세 거부서, 독립 공채 모집에 관한 인정서 등을 휴대하고 귀향하였다. 이현수(李賢壽)를 도와 이 문서들을 복사한 후 1921년 2월 말에 이르기까지 서장환(徐章煥)·정팔진(丁八鎭) 등과 함께 경상북도 일대의 관공리, 부호들에게 우송하는 한편 대구 시내 상점과 도로상에 살포하였다. 또 서장환과 이현수가 만든 『자유 신보(自由新報)』도 우송하였다.
또한 이들은 일제 식민 통치의 부당성을 알림으로써 세계 각국의 여론을 환기시키기 위하여 1921년 워싱턴에서 열리는 군축 회의에 서장환이 작성한 독립 청원서를 미국 선교사의 귀국편을 이용하여 제출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대구·평양·전주 등지의 외국인 선교사와 부산에 거주하는 외국인 의사 아벤에게 독립 청원서를 우송하고 워싱턴 회의에 즈음하여 독립운동을 촉구하는 내용의 『자유 신보』를 인쇄하여 『동아 일보』와 『조선 일보』 및 국내 각지에 배포하였다. 1922년 1월 관련자들과 함께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1923년 대구 지검으로부터 증거 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분되었다. 1930년 그는 공석 중이던 현풍면 면장의 선임과 관련하여 지역 유지들과 논의를 거쳐 행정 당국에 정리된 의견을 제출하는 방식으로 지역 현안 문제 해결에도 앞장섰다. 1945년 봄에는 달성군 현풍면의 신사(神社) 방화 사건에 연루되어 일제 경찰으로부터 가혹한 고문을 당하였다.
[상훈과 추모]
1983년에 대통령 표창, 1990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