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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청학[달성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80936
한자 權淸學[達城郡]
영어공식명칭 Kwon Jeonghak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9년 4월 15일 - 권청학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29일 - 권청학 대구 남문 장터에서 만세 시위 전개
활동 시기/일시 1919년 5월 19일 - 권청학 대구 복심 법원에서 징역 10월을 선고받음
추모 시기/일시 2007년 - 권청학 건국 훈장 애족장 추서
활동지 권청학 활동지 - 대구광역시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권청학(權淸學)[1899~?]은 1919년 달성군 공산면 도학동에 있는 동화사(桐華寺) 부속의 지방 학림(地方學林) 학생으로 있었다. 윤학조(尹學祚)와 함께 김문옥(金文玉)에게 만세 운동을 전개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에 3월 28일 동화사의 심검당(尋劍堂)에 모여 만세 독립운동에 관해 논의한 결과 1919년 3월 30일을 의거일로 정했다. 학생들은 처음 달성군 공산면 백안 시장에서 만세 시위를 전개하기로 계획했다가 사람들이 더 많이 모이는 대구의 남문(南門) 장터를 시위 장소로 정했다. 참여자들과 함께 비밀리에 태극기를 만들면서 만세 시위를 위한 준비를 갖추어 갔다.

3월 29일 9명의 학생들과 함께 태극기와 독립 선언서를 감추어 대구의 남문 장터로 향했다. 당시 대구에서는 3월 8일과 10일 두 차례에 걸쳐 만세 시위가 벌어졌던 터라 일본 경찰의 감시가 두터웠다. 오후 2시가 되자 대구 남문 장터에 모인 2,000명의 군중 앞에서 태극기를 높이 들고 독립 만세를 고창하며 만세 시위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자 장터에 있던 군중들이 호응하였다. 만세 시위 운동을 주도한 9명은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 1919년 4월 12일 대구 지방 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0월을 선고받고, 5월 19일 대구 복심 법원에서 징역 10월을 선고받아 대구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상훈과 추모]

2007년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 『대구의 뿌리 달성』 1-달성을 되짚다(달성문화재단·달성군지간행위원회, 2014)
  • 「판결문」(대구지방법원, 1919. 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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