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0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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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명찬 |
출생 시기/일시 | 1921년 11월 27일 - 김수영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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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28년 - 김수영 어의동 공립 보통학교 입학 |
수학 시기/일시 | 1935년 - 김수영 선린 상업 학교 입학 |
수학 시기/일시 | 1942년 - 김수영 선린 상업 학교 졸업 |
활동 시기/일시 | 1953년 - 김수영 거제리 수용소 석방 |
몰년 시기/일시 | 1968년 6월 16일 - 김수영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69년 6월 15일 - 김수영 시비 건립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91년 4월 - 김수영 시비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산107-2에서 도봉 서원 앞으로 이전 |
현 소재지 | 도봉산 국립 공원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도봉산 국립 공원 도봉 서원 앞 |
[시인의 꿈]
여기 시인이 있다. 시인이란 자고로 진(眞)과 선(善)과 미(美)가 갖추어진 나라에 대해 꿈꾸는 사람이지 않으면 안 된다. 시인은 그런 멋진 나라가 어디 멀리 다른 데가 아니라 바로 내가 발 딛고 있는 여기 이 땅에 펼쳐지기를 바란다. 그 점에서 시인은 근원적으로 혁명가이다. 적당한 진선미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완미(完美)한 진선(眞善)을 바란다는 점에서, 그런데 이 땅의 완전함이란 실현되기가 쉽지 않은 꿈이라는 점에서, 시인은 보통의 혁명가가 아니라 영원한 혁명가이지 않으면 안 된다.
시인은 진실하지 못한 것, 선하지 못한 것, 아름답지 않은 것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하고 질문하고 꾸짖어서 우리로 하여금 더 나은 단계로 나아가도록 등 떠민다. 불가능한 일을 가능토록 하는 일에 목숨을 거는 자(者), 그런 사람을 일러 시인이라 부를진대, 그 점에서 시인이란 참으로 가혹하고 처연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이렇게 슬픈, 불가능한 분투(奮鬪)에 목을 거는 시인의 운명은 그 자체로 아름답게 우리 뇌리에 판 박힌다. 그렇게 각인된 아름다움의 위로를 받아서 우리 보통 사람들은 삶이란 살아 볼만한 것이라고 고개 주억거리게 되고, 그런 인식들이 한 데 모일 때 역사라는 거대한 바퀴가 좌우로 비틀거리면서도 끝내 제 방향으로 굴러가게 되는 것은 아닌지.
[관철동 아이, 시인이 되다]
김수영은 일제 강점기인 1921년에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철동에서 태어났다. 여러 대에 걸쳐 벼슬을 한 것으로 확인되는 김수영의 집안은 부유한 편이었으나 일제 지배에 적응하지 못하고 몰락해 가는 중이어서 종로 6가로 용두동으로 자주 거처를 옮겨야 하는 형편이었다.
김수영은 1928년에 어의동 공립 보통학교[현 서울 효제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6년간 뛰어난 성적을 보였다. 그런데 졸업을 앞둔 9월부터 그만 장질부사에 폐렴과 뇌막염까지 호되게 겹쳐 앓으면서 일 년여 공부를 놓는 바람에 원하는 학교로 진학하지 못하였다. 이때의 투병 체험이 이후 김수영의 용모의 큰 틀을 결정한 것은 아닐까? 우리의 시선을 강렬히 사로잡는 김수영의 장년 이후의 정면 초상 사진들은, 대부분 기묘하리만치 선명한 고통의 느낌으로 우리에게 육박해 온다.
1935년 어렵게 선린 상업 학교 전수부[야간]로 진학한 김수영은 본과를 거쳐 1942년에야 학업을 마치게 되었다. 공식적 졸업으로 따지면 이것이 김수영의 최종 학력이다[일본의 한 고등 예비 학교에 잠깐, 해방 후 연희 전문학교에도 잠깐 적을 둔 적이 있다.].
여기서 떠오르는 의문 두 가지가 있다. 왜 하필 상업 학교일까 하는 점과 거기서 김수영이 주력한 공부가 무엇일까 하는 점이 그것이다. 앞의 것은 김수영의 가계가 여러 대에 걸친 중인 집안이라는 점, 당시 김수영의 아버지도 지전(紙廛)을 하며 집안을 다시 일으키려 고군분투하고 있었다는 점 등과 관계있어 보인다. 뒤의 것은 학적부에 그 답이 있다. 영어, 주산, 상업, 미술 등이 김수영이 마음을 기울인 과목들이었다. 6·25 전쟁 이후 김수영이 한 가족의 가장으로서 생계를 책임져야 하였을 때 선택한 영어 번역(飜譯)과 양계(養鷄)라는 수완은 이미 이때 싹이 준비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집안의 기대를 어깨에 얹고 대학 진학을 위해 건너간 일본에서 김수영의 내면에 당겨진 것은 예술혼이라는 불꽃이었다. 왜 그랬는지 전혀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김수영이 문득 대학 진학이라는 실리를 버리고 연극을 배우는 쪽으로 삶의 행로를 틀어 버렸던 것이다. 학병 징집을 피해 귀국한 서울에서도, 가족과 합가하여 나아간 일제 말의 만주에서도 김수영의 관심은 오로지 연극이었다.
그런데 그랬던 김수영이 해방과 함께 귀국하여 사람들 앞에 내놓은 것은 다름 아닌 「묘정의 노래」라는 시였다. 그로부터 23년간 김수영은 한국의 문학 판을 뒤흔든 문제적 시인으로, 그야말로 불꽃처럼 살다가 1968년 6월 16일 황망히 이승을 빠져나갔다. 참으로 쓸쓸하고 안타까운 퇴장이었다. 김수영이 생전에 마지막으로 우리들 앞에 내놓은 작품이 바람 소리로 가득 찬 「풀」이었다.
[설움과 자유]
해방기 김수영의 시는 라이벌 박인환(朴寅煥)의 말법을 많이 본받은 느낌이다. 스스로는 이 무렵의 자신의 시를 두고 ‘히야카시’[희롱이나 놀림의 의미, 곧 말장난]라고 불렀다. 김수영의 시에서 기교에나 신경 쓰는 말류 모더니스트의 풍모를 지적할 수 있다면 그 손가락은 정확히 이 무렵의 시들을 향해 있어야 옳다. 이 시기에도 이미 김수영은 시에만 쓰이는 곱고, 보드랍고, 촉촉하고, 아름다운 언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구체 현실이 빠진 관념과 기교 취향의 김수영 초기 시풍에 변화를 가져 온 것은 6·25 전쟁이었다. 대부분의 시인, 소설가, 평론가들이 대구, 부산 등지로 몰려가 이 다방, 저 다방 옮겨 다니며 소위 다방 문학을 하느라고 북새통일 때, 김수영은 서울에 남았다가 의용군에 붙들리어 갔다. 평안남도 개천에서 1개월 간 군사 훈련을 받고 평양 북쪽 순천에 배치되었다. 이미 그 무렵엔 유엔군이 평양으로 진격해 꼼짝없이 폭탄의 밥이 될 처지였다. 유엔군과 인민군이 맞붙은 야간 아수라장을 틈타 탈출을 시도하여 운 좋게도 충무로 집 근처까지 내려올 수 있었다.
하지만 운은 거기까지였다. 집에 발도 딛지 못한 채 경찰의 불심 검문에 걸려, 곧바로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보내졌다. 수용소에서의 김수영을 살린 것은 재미있게도 영어라는 신무기였다. 통역을 하며, 군의관과 사귀며, 틈틈이 미국에서 발행되는 『타임』, 『라이프』 등을 탐독하며 수용소 시절을 넘긴 김수영은, 부산의 거제리 수용소로 보내진 뒤 1953년에 석방되었다.
이 난리 체험이 시인으로 하여금 자신이 발 딛고 있는 이 근대 세계라는 괴물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본주의, 물질 만능주의를 바탕으로 치밀하게 재조직된 근대 서울의 삶에서 김수영이 발견한 것은 ‘비애’와 ‘설움’[「거미」]이었고 그것을 돌파할 힘은 ‘자유’[「헬리콥터」]에 대한 갈망에서 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눈」의 마지막 연]
기침과 가래란 죽은 삶에 들러붙는 비애와 설움이다. 삶을 살리는 길은 그 부정적인 것들을 마음껏 내뱉을 수 있는 자유라는 것, 눈 같이 정결한 살아 있음이란 그런 후에라야 얻어진다는 것을 시 「눈」이 보여 주고 있다. 이 무렵의 또 다른 명작 「폭포」를 통해 김수영은 억압을 벗어던진 자유란 폭포처럼 떨어지는 고매하고 올곧은 정신의 힘으로 구해지는 것이라는 전언(傳言)을 던지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시인은 또 그러한 갈망에 너무 조급하게 매달릴까 봐 다음처럼 아름답게, 유장하게 자기 자신을, 우리를 설득하기도 한다.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 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빛이여/ 오오 인생이여[「봄밤」의 2연]
[끈질긴 부드러움의 힘]
4·19 혁명이 터졌다. 농축된 비애, 압축된 설움들이 한꺼번에 도도하고 자유롭게 흘러넘쳤다. 김수영은 거기서 역사의 눈부신 빛을 보았다. 개인적 욕심 따위 사특한 모든 것을 눌러 죽이고 민족이나 나라의 새로운 앞날만을 생각하는 공적(公的) 마음씨들의 융융한 흐름 앞에 감격하여 목이 멨다. “시를 쓰는 마음으로/ 꽃을 꺾는 마음으로/ 자는 아이의 고운 숨소리를 듣는 마음으로”[「기도」] 혁명을 완수하자고 주문을 외기도 하였다. 이대로라면 통일도 머잖은 듯하였다. 격렬하고 정직하였으나 대책 없었던 1년이 그렇게 지나갔다. 그러나 혁명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날의 광장은 군인들 차지가 되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무엇이 문제였을까? 혁명의 적(敵)은 누구였을까? ‘그 놈’의 동상을 끌어내리고 사진을 떼 내어 밑씻개로 쓰면 혁명이 완수되는 게 아니었던가? 아아, 아니었다. 그렇게 큰 적만 있는 게 아니었다. 적은 도처에, 심지어 내 안에도 있었다. 큰 적을 쓰러뜨리느라 골몰하는 사이에도 우리 안의, 생활 속의 작은 적들은 끊임없이 준동하여 혁명의 물길을 반동적으로 되돌려 놓으려 하였다. 아하, 어쩔 수 없이 큰 혁명만을 염두에 두던 인식 태도를 바꾸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시 「그 방을 생각하며」의 화자가 혁명은 안 되고 방만 바꾸었노라고 고백할 때, 바꾼 방이란 기실 생각이 들어앉은 방일 터이다.
방을 바꾸니 두 가지가 새로 보였다. 하나는 혁명하는 사람들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이었다. 지식인, 대학생, 기자, 문필가 등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이 커다란 목소리로 혁명하자고 말하면 다 되는 줄 알았지만, 명수, 잿님이, 경복이, 두붓집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마음에 혁명이 자리 잡지 않으면 소용없다는 것, 그들 안에 든 적들을 스스로 해치우는 수준이 되어야 비로소 혁명은 완수의 단계로 접어든다는 것을 깨달았다. 민중 혹은 민초가 역사를 밀고 가는 근원적 힘이라는 이런 인식을 두고 굳이 민중주의라는 생경한 이름을 붙일 필요는 없어 보인다. 민주주의의 본령이 본디 거기 있기 때문이다.
민중의 역할에 대한 이 깨달음이 김수영을 우리 것, 전통에 대한 신뢰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만든다. 그 결과 김수영은 “더러운 진창, 더러운 역사를 구성하는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피혁점, 곰보, 애꾸, 무식쟁이, 이 모든 반동들이 우리의 현재를 구성하는 거대한 뿌리”[「거대한 뿌리」]라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 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20원 때문에 10원 때문에 1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1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 정말 얼마큼 작으냐……[「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마지막]
이 시의 화자는 말한다. 1원 때문에 10원 때문에 20원 때문에 싸우고, 이발쟁이와 야경꾼에게 대들고 하는 것이 결코 작은 일이 아님을.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 년이 제값에 맞는 음식을 내놓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는 바와 같은, 저 밑으로부터의 혁명이 동시 다발적으로 진행되지 않는 한, 월남 파병에 반대하고 잡혀간 소설가를 석방하라고 정정당당하게 요구하는 큰 목소리의 혁명도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니 모래와 먼지와 풀과 바람이 하찮은 것이 아니듯 1원짜리 싸움도 결코 부질없지 않다. 오히려 그게 시작점인 것이다.
두 번째로 김수영이 본 것은 사랑의 힘이었다. 적 혹은 원수가 있어 ‘적 혹은 원수’라는 말로 규정하고 삿대질 해 대면 그것은 결코 자신의 부정적 속성을 덜어 내지 않는다. 오히려 나쁜 것을 안으로 꽁꽁 싸매고 공격에 대비한다. 나그네가 외투를 벗은 것은 심술궂은 바람 때문이 아니라 따사한 햇볕 때문이었다. “이 웬수같은 넘아.” 하고 근본적으로 말 밑바닥에 애정을 싣고 말할 때, ‘그 넘’이 원수와 적의 속성을 조금씩 벗어던지게 된다는 것이다.
자본제적 근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사회주의적 화살을 들이대며 너 변해라 하고 윽박지른들 끄떡이나 하던가. 온기와 핏기가 도는 자본이 되도록 달래고 보듬으며 함께 이 지옥의 한 철을 넘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을 두고 “아픈 몸이/ 아프지 않을 때까지 가자/ 온갖 식구와 온갖 친구와/ 온갖 적들과 함께 /적들의 적들과 함께 /무한한 연습과 함께”[「아픈 몸이」]라고 표현하였던 것이다.
한번 그렇게 마음먹고 나자 세상의 변화에 대한 믿음이 보다 확고해진다. “사랑의 음식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사랑의 변주곡」]고 나니, 하찮기 그지없던 잿님이 할아버지, 경복이 할아버지가 실은 대단한 폭발력을 지닌 “단단한 고요함”이라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그 단단하고 고요한 “복사씨와 살구씨가/ 한번은 이렇게/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것이다. 부드러운 사랑의 힘이 스치듯 만든 균열 하나가 힘세고 딱딱하고 거대한 것들을 속으로부터 부수어 무너뜨릴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 사랑도 많이 아프고 울고 눕고 해야 한다. 그렇지만 끈질기게 버틴 부드러움이, 사랑이 결국엔 먼저 웃게 된다고 시 「풀」은 우리 귀에 대고 나직나직 여태도 중얼거리고 있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김수영을 찾아서]
도봉산의 주 등산로를 따라 도봉 서원 근처에까지 이르면 조그마한 공원이 하나 꾸려져 있다. 그 한가운데[나림(那林) 이병주(李炳注)의 북한산 찬가비가 서 있는 지점과 불과 200~300m도 안 떨어진 지점]에 김수영의 시비(詩碑)가 서 있다. 진작부터 이 시비는 내용과 형식이 잘 어우러진 몇 안 되는 예의 하나로 글 쓰는 패거리들에게 손꼽혀 왔다. 많은 이들이 김수영 시비 하나를 목표로 먼 길을 가슴에 새기며 다녀간다는 뜻이다.
현대 문학사와 문우들이 주관하여 김수영의 사후 1년째인 1969년 김수영의 무덤 옆에 세웠던 것인데, 1991년 4월에 현재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 김수영 시비의 전면에는 김수영의 시 「풀」의 한 부분이 시인 자신의 글씨로 음전하게 음각되어 있다. 참고로 시비의 전액(篆額)은 당대의 명필 배길기가 돌렸다. 염상섭(廉想涉)의 묘비 글씨도 배길기의 작품이다.
1968년 6월 15일 운명의 그날 밤, 김수영은 『한국 일보』 기자 정달영, 「소설 알렉산드리아」와 「마술사」를 발표하여 이제 막 문단의 각광을 받고 있던 동갑내기 작가 이병주와 함께, 청진동과 을지로 입구 등을 돌며 늦게까지 술자리를 가졌다. 이병주가 자신의 볼보 승용차[1969년이다!]로 데려다 주겠다는 것을 뿌리치고 김수영은 이병주에게 ‘딜레탕트’라 욕설을 퍼부었다. 그리고 김수영은 혼자 일어서 집으로 갔고, 자정 무렵 집 근처에서 좌석 버스에 치이고 말았다. 서울 적십자 병원으로 급히 후송되었지만, 이튿날인 16일에 영영 눈을 감았다. 48세였다.
김영태(金榮泰)의 시에 6월 16일이라고 두 번이나 등장하는 바로 그 기일에, 황동규(黃東奎)의 시에 등장하는 바로 그 언덕 자리 선영에, 김수영은 자신의 음택(陰宅)을 들이고 누웠다. 김수영 시비는 풀풀 먼지 날리는 등산로 상에 서서, 이 모든 사실을 묵묵히 기리고 있다. 따라서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그 언저리는, 도봉 서원이 아니라 김수영 시비가 있는 어름으로 기억되고 다가온다. 이병주와 김수영은 도피안의 거기 어디쯤서 화해의 악수를 나누긴 하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