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0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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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문화·교육/교육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나종현 |
[정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에 있는 서원.
[개설]
도봉서원(道峯書院)은 현재 서울 지역에 남아있는 유일한 조선 시대의 서원이다. 1573년(선조 6)에 양주 목사(楊州牧使)로 부임한 남언경(南彦經)이 조광조(趙光祖)의 학문과 행적을 기리는 뜻으로 건립했고, 이듬해에 사액(賜額)을 받았다. 이후 도봉서원은 300여 년 간 서울·경기 지역 선비들의 주요한 교유처가 되었으나, 고종 대에 서원 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 현재는 세 칸 정도 되는 사우(祠宇)와 세 개의 문이 남아있고, 조광조와 송시열(宋時烈)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도봉서원 주변 계곡에는 조선 시대 문인들이 남긴 글씨들이 새겨진 바위들이 많다. 도봉서원과 그 주변 유적들에 대한 기록은 조선 후기 주요 문인들의 문집에서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사림들의 전국적인 지원에 의해 건립된 도봉서원]
도봉서원은 조선 시대 서울·경기 지역에서 가장 먼저 건립된 서원이며, 그 건립 과정은 16세기 사림들의 정치적 영향력 확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서원의 건립자는 양주에 목사로 부임하였던 남언경이었다. 1573년 남언경이 도봉 서원 건립을 시작했을 때는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중심으로 하는 사류들이 조정에 대거 진출하여 세력을 형성해 나가면서 기묘 사림의 복권과 훈신(勳臣)의 축출이 완료 되어가던 때이다. 남언경은 기묘 사림의 우두머리인 조광조를 기리기 위해 도봉산의 영국사(寧國寺) 터에 서원을 영건하고 조광조를 제향하였다. 도봉서원은 영국사 터에 지어졌기 때문에 처음에는 영국 서원(寧國書院)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당시 도봉서원의 공역이 진행될 때는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사류들에게 통문이 널리 발해지는 등 전국적인 규모로 서원의 영건이 진행되어 1579년 완성되었다.
[국가의 지원을 받은 권위 있는 교육 기관]
도봉서원의 건설이 진행되던 1574년 9월 조정에 있던 부제학 유희춘(柳希春) 등이 서원의 사액을 청하였다. 선조는 이에 대해 도봉서원이 도성의 근처에 있는데다가, 서원 첩설이 논란이 되고 있는 시점에 도봉서원을 사액하는 것이 세간의 비판을 받을 수 있다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으려 하였다. 그러나 여러 사림들의 청원에 결국 ‘도봉’이라는 사액을 내려주었다. 사액을 받은 도봉서원에는 막대한 전답이 지급되었는데, 본래 영국사에 소속되어 있던 전지 외에도 호남의 면세지 100여결이 추가 지급되면서 명실상부한 국가 공인 교육 기관의 위상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에도 도봉서원에는 조광조의 문인들을 중심으로 지속적인 경제 지원이 이루어졌고, 17세기 이후에는 서인 계열 유력 인사들을 중심으로 막대한 물력을 제공받는 서원이 되었다.
[도봉서원을 거쳐 간 조선의 유명 인사들]
사림들의 전폭적인 지지에 힘입어 건립된 도봉서원은 공역 과정에서는 물론이고, 이후에도 서울·경기 지역의 유명한 인물들이 즐겨 찾아 공부하고 교유하는 명소가 되었다. 먼저 공역 과정의 주도 인물로는 부제학 허엽(許曄), 좌참찬 백인걸(白仁傑), 이조 참판 박소립(朴素立)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모두 조광조의 문인이었다. 이중 허엽은 서원 공역의 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주변 선후배 사류들에게 재정의 지원을 부탁했고, 서원의 규령(規令)을 제정했다는 기록이 이이가 지은 「도봉서원기」에 전해진다.
도봉서원은 건립 이후로 계속해서 서울과 그 주변 지역의 명사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되었으며, 유력 가문 자제들의 수학처나 학문 토론 장소로 이용되었다. 특히 효종 대 이후부터는 송시열, 김상헌(金尙憲), 이단상(李端相), 권상하(權尙夏), 윤봉구(尹鳳九), 김수항(金壽恒), 김창협(金昌協), 박세채(朴世采) 등 서인의 유력 인사들이 많이 다녀갔다.
[도봉서원의 원장은 누가 되었을까?]
도봉서원은 서울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정계의 권력 흐름과 밀접히 관련된 곳이었다. 17세기 이후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거의 서인 계열의 사류들이었다는 점, 서울에서 높은 관직 생활을 하고 있는 명망 있는 인사들이 도봉서원의 역대 원장을 맡았다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도봉서원 원장은 관인 신분이었기 때문에 서원에 기거하지 않고, 서울에서 원장 직함만 가지고 있는 상징적인 존재였다. 그러나 이 상징성은 매우 큰 의미가 있었다. 도봉서원이 서울의 유력 가문 자제들이 공부나 유람을 위해 반드시 찾는 장소였기 때문에, 서원의 원장 자리는 당대에 최고의 정치적, 또는 학문적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인물이 차지하였다. 대표적으로 인조반정 공신이자 병자호란과 이괄의 난에도 인조를 보호한 공을 세워 효종 대에 영의정까지 역임한 이시백(李時白), 숙종 대에 서인 내부의 노·소 대립을 조정하며 탕평의 이론을 제공했던 박세채 등이 도봉서원의 원장이었다.
[도봉서원의 전성기와 쇠퇴기]
16세기에 건립된 도봉서원은 노론과 소론의 정치적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던 숙종 대부터 영조 대 중반까지 서울 유력 인사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전성기를 누렸다.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 송시열의 도봉서원 향사 여부를 둘러싼 노·소 간 논쟁이다. 이 사건은 노론과 소론의 분기가 이루어진 이후에 도봉서원을 둘러싸고 발생한 정치적 대립이었다는 점에서 기억할 만하다.
1696년(숙종 22)에 송시열이 조광조와 함께 도봉서원에 병향(並享)되었는데, 이를 두고 노론과 소론 사이에 찬반 논쟁이 벌어졌다. 노론 계열은 송시열의 위상이 조광조와 비견될 만하다고 생각해 병향을 찬성하는 입장이었고, 소론 계열은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이후 송시열의 도봉서원 향사 문제는 노론과 소론 사이의 정치적 대립과 지속적으로 민감하게 연관되었다. 경종 때인 1723년(경종 3) 노론 4대신을 비롯한 대부분의 노론 세력이 조정에서 축출당할 때, 송시열의 위패도 도봉서원에서 출향되었다. 그러나 영조의 즉위 이후인 1725년(영조 1)에는 다시 배향되었다.
1775년(영조 51)에 영조가 ‘道峯書院(도봉서원)’이라는 현판을 친필로 써서 내리면서 도봉서원은 친필 사액 서원이 되었고, 문묘에 배향된 조광조·송시열 양현(兩賢)을 모시는 명실상부한 최고 서원의 위상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도봉서원은 영조·정조 탕평 정치기를 거치면서 사림과 서원의 정치적 중요성이 감소되던 분위기에 따라 점차 그 영향력을 상실해 갔으며, 1871년(고종 8)에 흥선 대원군(興宣 大院君)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
이후 1903년에 도봉서원 주변 유림들이 서원의 제단을 정비하고 봄·가을로 제사를 지냈지만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을 겪으면서 옛날의 규모와 명성을 재건할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 1970년에 들어 양주 향교 전교(典校) 남궁복(南宮墣)을 중심으로 조직된 도봉서원 재건 위원회가 서울 유지들의 경제적 지원을 받아 서원의 동북쪽에 서향으로 사우를 다시 건립하여 조광조와 송시열을 병향(並享)하고 그 앞에 신삼문(新三門)을 세웠다. 그러나 옛날 모습처럼 완벽하게 서원을 중건하지는 못했다.
[도봉서원의 학규와 학령]
도봉서원의 학규(學規)와 학령(學令)에 대해서는 율곡이 지은 「도봉서원기」의 내용을 참고하여 알아볼 수 있다. 「도봉서원기」에는 서원의 학규와 학령은 서원의 여러 학생들이 부제학인 허엽에게 물어보고 정했다고 되어있다. 이 때 정한 서원의 규령을 비롯한 서원의 자료들은 서원에 별도로 보관되어 있었겠지만, 전쟁 중의 소실과 중수·훼철 등의 과정에서 거의 흩어져 버려 그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다.
조선 시대에 건립된 서원들의 경우 규령들은 대부분 주희의 「백록 동규(白鹿洞規)」와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이산 서원 원규(伊山書院院規)」를 근간으로 삼고, 각 서원마다 조목을 가감하였다. 그러나 도봉서원의 경우 이이가 서원의 건립과 운영에 영향을 주었고, 이후 서인 학자들의 서원 출입이 빈번해 지면서 그가 마련한 문헌 서원(文憲書院)의 학규와 비슷한 내용의 규령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수재집(寒水齋集)』에 있던 「답도 봉원규(答道峯院規)」를 통해서도 도봉서원의 학규 일부를 알 수 있다. 주로 서원에 기거하는 유생들이 재임(齋任)을 대하는 방법, 외부인을 접견하는 예절, 서원의 구성원들의 기거처, 서원 유생들이 죄를 지었을 때 처벌의 방식, 재임의 선출 방법, 제사 의례, 청소, 의복 등에 대한 규칙이다.
[도봉서원의 구조]
현존하는 도봉서원의 건물과 그 배치는 세 칸의 사우와 신문(神門)·동협문(東夾門)·서협문(西夾門) 정도만 남아있으나, 여러 기록을 통해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있다. 조선 시대의 여러 서원들은 북쪽에 사우가 있고 그 앞에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양쪽으로 마주보며, 남쪽에 서원 있고 그 가운데에 강당(講堂)이 있으며 양쪽에 협실이 있는 전형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도봉서원도 이러한 전형적인 구조를 따르면서, 지형을 이용해 서원 주변 계곡에 행랑(行廊)을 마련하고 주변 지형을 따라 문을 만들었다. 동재의 이름은 ‘의인재(依仁齋)’, 서재의 이름은 ‘습시재(習時齋)’, 사우의 이름은 ‘도봉사(道峯祠)’였음도 알 수 있다. 또한 서원의 입구에는 송시열이 쓴 ‘道峯洞門(도봉 동문)’ 바위가 있다.
서원 강당과 누각에 대해서는 윤추(尹推)의 『농은유고(農隱遺稿)』에 남아있는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서원의 동재인 의인재 앞으로 십 보 정도 떨어진 곳에는 ‘계개당(繼開堂)’이라는 강당이 있었고, 강당의 가운데에는 영조가 어필로 내린 ‘도봉서원’ 편액이 걸려있었다. 강당 앞 수십 보에는 작은 누각이 개울과 닿아 있었으며, 그 옆에는 서족 처마에 ‘광풍(光風)’이라고 편액한 ‘침류당(枕流堂)’이 있었다. 그 밖에도 서원 내에는 책을 보관하는 서고(書庫), 제수를 차리는 전사청(典祠廳), 서원지기들이 거주하던 교직사(校直舍)가 있었으며 서원 주변에는 광풍당, 제월루(霽月樓), 영귀문, 무우대 등이 있었다.
[도봉서원 주변의 문화 유적]
도봉서원 오른편에는 수령 200년이 된 느티나무가 있고, 주변 계곡에는 여러 명사들의 글씨가 새겨진 각석들이 많이 있다. 『한수재집』의 「소광정기」에 따르면, 권상하가 도봉서원에 방문한 18세기 당시에는 서원 주변에 20여 개의 석각이 있었다.
현재는 도봉 계곡의 초입, 도봉서원의 주변, 도봉 계곡의 상류의 3개 군으로 대략 나눌 수 있다. 도봉 계곡의 초입에는 도봉서원의 입구임을 알리는 송시열의 ‘도봉 동문’ 글씨가 대표적인 것이다. 도봉서원 주변에는 송시열이 주희의 시인 ‘제월광풍갱 별전 료장 현송 답잔원 화양 노부서(霽月光風更別傳 聊將絃誦答潺湲 華陽老夫書)[비가 개고 달이 올라 시원한 바람이 다시금 특별히 이어받았도다. 애오라지 거문고를 치며 노래하여 졸졸 흐르는 물소리에 화답하네. 화양 노부 쓰다]’를 바위에 새긴 글씨가 있고, 그 주변으로는 윤봉구·권상하 등이 새긴 무우대 바위 글씨, 송준길의 염락정파 수사진원 춘옹서(濂洛正派 洙泗眞源 春翁書) 바위 글씨, 이재(李縡)의 광풍제월 천옹서(光風霽月 泉翁書) 바위 글씨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