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5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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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喜朝 |
이칭/별칭 | 동보(同甫),지촌(芝村),간암(艮庵),지사재(志事齋),문간(文簡)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나종현 |
[정의]
조선 후기 도봉구 지역을 포함한 양주 일대를 관할하는 양주 목사를 역임한 문신.
[가계]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동보(同甫), 호는 지촌(芝村)·간암(艮庵)·지사재(志事齋). 증조할아버지는 좌의정을 지낸 이정구(李廷龜)이고, 할아버지는 대제학·예조판서 등을 역임한 이명한(李明漢)이다. 이명한은 병자호란 후 척화파로 지목되어 심양에 억류된 바 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아버지는 부제학에 임명되고 이조판서에 추증된 이단상(李端相)으로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활동 사항]
이희조(李喜朝)[1655~1724]는 1669년(현종 10) 아버지가 죽자 묘표를 송준길(宋浚吉)에게 청하였으며, 이후 송시열(宋時烈)을 찾아가 학문을 배웠다. 1674년(현종 15) 갑인예송(甲寅禮訟)으로 송시열이 유배당하자 양주의 지동(芝洞)에 은거하였다. 아버지 이단상 또한 1664년(현종 5) 양주 동강(東岡)으로 퇴거한 바 있어 이희조와 양주 지역의 인연은 매우 깊다고 할 수 있다.
1680년(숙종 6) 경신환국 후 민유중(閔維重)이 유일(遺逸)로 천거하여 건원릉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을 청하였다. 1683년(숙종 9) 다시 천거되어 의금부 도사와 공조 좌랑, 진천 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1689년(숙종 15) 스승 송시열이 사사(賜死)되자 영동 흡곡(歙谷)에 은거하였다. 1695년(숙종 21) 인천 현감을 거쳐 동궁 서연관(東宮書筵官), 사헌부 지평, 천안 군수, 해주 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해주 목사로 재임할 때 이이(李珥)의 유적을 찾아 요금정(搖琴亭)을 세우고, 이제사(夷齊祠)의 편액을 송시열의 글씨로 바꿔 달기도 하였다.
1700년(숙종 26) 12월 지금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지역이 포함된 양주 목사에 임명되어 1701년(숙종 27) 1월 부임하였다. 양주 목사 재임 시 어머니의 상을 당하기도 하였다. 1707년(숙종 33) 양주 독정리에 있는 아우 이하조(李賀朝)의 장지(葬地) 문제로 산송을 겪고 이세덕(李世德)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이 일로 벼슬을 사양하다가 1717년(숙종 43) 이후 대사헌, 부호군 등을 역임하였다.
1721년(경종 1)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으로 노론 4대신이 역모 죄로 주살되자 이희조 또한 이들과 결탁했다고 하여 문외 출송되었다가 1723년(경종 3) 1월 영암으로 유배되었다. 그해 11월 철산으로 이배가 결정되어, 이듬해 1월 유배지로 가던 중 정주(定州)에서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학문으로 유명한 명문가의 후손으로서 송시열에게 학문을 배워 노론계의 학통을 이었다. 저서로 『지촌집(芝村集)』이 있다.
[묘소]
본래 용인의 문수산에 장사 지냈다고 하나, 현재 이희조의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산1-1번지에 있다. 부인 안동 김씨와 합장묘로 조성되어 있으며 묘표, 혼유석, 장대석, 상석, 향로석, 망주석 등의 석물을 갖추고 있다.
[상훈과 추모]
1725년(영조 1) 신원되어 좌찬성에 추증되고 문간(文簡)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그해 인천의 학산 서원(鶴山書院)에 제향되었다. 1775년(영조 51)에는 평강의 산앙재 영당(山仰齋影堂)에 봉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