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7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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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寅普 |
이칭/별칭 | 경업(經業),위당(爲堂),담원(薝園),미소산인(薇蘇山人),정경시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쌍문2동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류정선 |
출생 시기/일시 | 1892년 - 정인보 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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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2년 - 정인보 상해에서 동제사 조직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83년 - 정인보 『담원 정인보 전집』 발간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정인보 건국 훈장 추서 |
출생지 | 서울 |
거주|이주지 | 정인보 은거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쌍문 2동 580 |
거주|이주지 | 정인보 은거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쌍문 2동 597 |
성격 | 학자 |
성별 | 남 |
본관 | 동래 |
대표 관직|경력 | 대한민국 감찰위원장 |
[정의]
일제 강점기 현재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창동에 은거한 독립운동가이자 국학 연구자.
[가계]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경업(經業), 호는 위당(爲堂)·담원(薝園)·미소산인(薇蘇山人). 어릴 때 이름은 정경시였으며, 조선 명종 대 대제학 정유길(鄭惟吉)의 자손으로서 증조할아버지는 철종 대 영의정을 지낸 정원용(鄭元容)이다. 아버지는 장례원 부경(掌隷院副卿), 호조참판(戶曹參判)을 역임한 정은조(鄭誾朝)이지만, 큰아버지인 정묵조(鄭默朝)에게 양자로 들어갔다. 생모는 달성 서씨(達成徐氏)이고, 양모는 경주 이씨(慶州李氏)이다. 처는 성건호(成健鎬)의 딸 창녕 성씨이고, 후처는 조동준(趙東俊)의 딸 풍양 조씨이다.
[활동 사항]
정인보(鄭寅普)는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한문을 배웠고, 13세 때부터 이건방(李建芳)[1861~1936]에게 양명학 등을 배웠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관직으로 진출할 뜻을 버리고 부모와 더불어 진천(鎭川)·목천(木川) 등지에 은거하며 학문에 전념하였다. 1910년 한일 늑약이 되자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신채호(申采浩)·박은식(朴殷植)·신규식(申圭植)·김규식(金奎植) 등과 함께 동제사(同濟社)를 조직, 정치적·문화적 계몽 활동을 통한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그러나 본국에 있던 부인 창녕 성씨가 갑자기 사망했다는 말을 듣고는 어머니를 위로코자 귀국하였다. 이후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여러 차례 일본 경찰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이후 서울로 이사하여 연희 전문학교·협성 학교(協成學校)·불교 중앙 학림(佛敎中央學林)·불교 전문학교·이화 여자 전문학교 등에서 한학과 역사학을 강의하였다. 또한 『동아 일보』·『시대 일보』의 논설위원으로 활약하며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정인보는 많은 학술 활동을 하였다. 1931년 『동아 일보』에 「조선 고전 해제」를 연재, 우리 민족의 유산을 널리 알리고자 하였다. 또 1933년에는 『동아 일보』에 「양명학 연론(陽明學演論)」을 연재, ‘지행합일(知行合一)’을 강조하였다. 1935년에는 정약용(丁若鏞) 사후 100주년을 맞아 조선 후기의 실학을 소개하며, 실학 연구를 주도하였다. ‘실학’이라는 역사적 용어도 이때부터 사용되었다. 1936년에는 연희 전문학교 교수로 한문학·국사학·국문학 등을 가르쳤다.
2차 대전이 발발하자 정인보는 양주군 노해면 창동리 733번지[현재 도봉구 쌍문 2동 580번지, 쌍문 2동 597번지로 분할됨]로 이사하여 은거하면서 김병로(金炳魯), 송진우(宋鎭禹) 등과 교류하였다. 하지만 전쟁이 더욱 격화되면서 국학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거세지자 1943년 가족들과 함께 전라북도 익산군 황화면 중기리[현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 지역]의 산 속으로 들어가 은거하였다.
해방이 되자 곧 상경하였으며, 1946년 9월 『조선사 연구(朝鮮史硏究)』를 간행하였다. 『조선사 연구』는 엄밀한 사료 추적에 의한 사실 인식과 그에 대한 민족사적 의미를 부각시키는 신민족주의 사학을 지향하였다. 1947년에는 국학 대학(國學大學) 학장에 취임하여, 국학 발전과 교육 사업에 힘썼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감찰위원장이 되었으나 정부의 간섭으로 의지를 펼 수 없다고 판단, 1년 뒤 사임하였다. 이후 남산동에 은거하면서 국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1950년 7월 31일 서울에서 인민군에 의해 납북되었다.
[학문과 저술]
30여 년 가까이 대학 강단에서 실학·양명학과 역사학, 국문학 등을 강의하고 연구하였다. 저술로는 『조선사 연구』·『조선 고전 해설』·『양명학 연론』·『담원 시조집(薝園時調集)』·『담원 문록(薝園文錄)』·『담원 국학 산고(薝園國學散藁)』 등이 있다. 1983년에는 정인보의 저술을 묶은 『담원 정인보 전집』이 발간되었다.
[상훈과 추모]
정인보는 국문학과 국사 연구 및 우리말 보존에 앞장서 지식인으로 국혼 수호에 기여한 사실을 인정받아 1990년 대한민국 건국 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