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17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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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임나영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47년 2월 14일 - 김근태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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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65년 - 김근태 서울대학교 상과 대학 경제학과 입학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71년 - 김근태 서울 대학생 내란 음모 사건으로 수배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74년~1981년 - 김근태 ‘긴급 조치 9호’ 위반으로 7년간 도피 생활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77년 - 김근태 인재근과 결혼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83년 - 김근태 민주화 운동 청년 연합[민청련] 결성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87년 - 김근태 부부 공동으로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 수상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92년 - 김근태 ‘민주 대개혁과 민주 정부 수립을 위한 국민회의’ 결성 및 집행 위원장 역임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95년 - 김근태 새정치 국민회의 입당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96년 - 김근태 제15대 총선 서울 도봉구갑 선거구 국회 의원 당선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00년 - 김근태 제16대 총선 서울 도봉구갑 선거구 국회 의원 당선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04년 - 김근태 제17대 총선 서울 도봉구갑 선거구 국회 의원 당선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04년 7월~2005년 12월 - 김근태 보건 복지부 장관 역임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06년 6월~2007년 2월 - 김근태 열린 우리당 의장 역임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11년 - 김근태 사망 |
[개설]
“김근태 동지여, 길이 젊고 푸르거라!”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위한 민주화 운동의 열기가 전국을 뜨겁게 달구던 1987년 7월, 고(故) 문익환(文益煥) 목사는 김근태(金槿泰)[1947~2011]에게 이렇게 명령하였다. 그 열망은 반만 실현되었다. 민주주의자 김근태는 언제나 젊고 푸르게 온몸으로 이 땅의 민주화를 노래하였지만, 김근태의 삶은 길지 않았다. 2011년의 끝자락에 김근태는 함께 시대를 노래하였던 많은 민주주의자들의 눈시울을 적시며 65세의 너무도 아까운 나이로 유명을 달리하였다. 길지 않은 삶이었지만, 김근태의 외침은 널리널리 퍼져나가 이 땅에 민주주의를 심고, 뿌리내리고, 꽃피우는 데에 소중한 힘이 되었다. 한국 재야 민주화 운동을 온몸으로 노래하였던 김근태의 삶을 추적해 본다.
[대학 재학 시절, 민주화 운동의 첫걸음]
김근태는 1947년에 경기도 부천시에서 태어났다. 중학교 3학년이던 1961년에 일어난 5·16 군사 정변으로 교직에 있던 김근태의 아버지는 강제로 학교를 떠나야 했고, 곧 세상을 떠났다. 어쩌면 세상을 보는 눈을 갖기 시작했던 때부터 김근태에게 민주화는 숙명적인 과제로 다가왔을지도 모른다. 김근태가 민주화 운동의 첫 걸음을 내딛게 된 것은 1965년에 서울대학교 상과 대학 경제학과에 입학하면서부터였다.
난세가 영웅을 만든다고 했던가? 이 무렵 대학은 독재 정권에 대항하는 가장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내고 있었고, 이후에 한국 사회의 민주화를 주동한 많은 민주주의자들을 품고 있었다. 이에 정권에서도 가장 가혹한 수법을 동원하여 이들을 탄압하고 있었다. 1967년에 치러진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朴正熙)가 신민당의 후보 윤보선(尹潽善)을 110만 여 표차로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김근태는 이때의 대선을 부정 선거로 규정하고 이를 규탄하는 시위를 주동하였다가 경찰에 체포되었다. 훗날 김근태는 이때에 경찰에서 숱한 매를 맞아야 했다고 이야기하였다. 민주주의를 거스르는 물결을 온몸으로 받아내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 아니었을까? 이 일로 김근태는 대학에서 제적당하고 강제로 육군에 입대하였다.
1970년, 3년 만에 제대하고 학교로 돌아온 후에도 김근태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시들지 않았다. 1969년에 있었던 3선 개헌과 1971년 초의 교련 반대 시위 등에 깊이 개입하였다. 정권은 서울 대학생 내란 음모 사건을 조작하여 이들을 탄압하였다. 그 결과로 동료였던 조영래, 장기표 등은 구속되었고, 김근태는 수배되어 그의 생애 첫 번째 도피 생활을 시작하였다. 당시 경제학과의 교수 변형윤의 도움으로 김근태는 수배 생활 중이었음에도 1972년에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1970년대, 끝이 보이지 않는 도피 생활]
1972년 10월 유신을 통해 영구 집권을 도모한 박정희 정권은 기관사를 잃은 기관차처럼 독재의 서슬 퍼런 칼날을 휘두르고 있었다. 청년 김근태는 이 칼날을 온몸으로 받아내면서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걸어야 했다. 1971년의 서울 대학생 내란 음모 사건으로 수배가 된 김근태는 이후 1974년, 헌법 비방이나 반대, 유언비어 유포, 허가 없는 학생 시위·집회 금지 등을 골자로 하는 ‘긴급 조치 9호’ 위반으로 다시 수배 대상에 올라 이후 7년간의 도피 생활을 겪었다. 그 와중에도 김근태의 민주화 운동은 숨죽지 않았다. 비록 수면 위에 나서서 활동을 하지는 못했을지언정 김근태의 도피 생활은 그 자체가 민주화를 위한 몸부림이었고, 많은 이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북돋워 준 것이었다. 수배 중이던 1977년에는 당시 인천 부평의 봉제 공장에서 위장 취업을 하고 있던 인재근(印在槿)과 결혼하였다.
[1980년대, 재야 민주화 운동의 핵심으로]
유신 정권이 비참한 종언을 고하면서 김근태도 자연스럽게 수배가 해제되었다. 그러나 김근태가 마주해야 했던 현실은 아직 그가 바라던 세상이 아니었다. 12·12 사건과 5·18 민주화 운동으로 열린 1980년대는 김근태를 다시 재야 민주화 운동의 구심점으로 소환하였다. 1983년에는 1970년대 학번 학생 운동가 출신들과 함께 민주화 운동 청년 연합[민청련]을 결성하여 초대 의장을 맡았다. 민청련은 참된 민주 정치 확립, 민주 자립 경제 이룩, 부정부패 특권 경제 청산, 냉전 체제의 해소와 핵전쟁의 방지 등을 기치로 내걸며, 전두환(全斗煥) 정권에 반대하는 민주화 운동의 선봉 구실을 하였다.
그러나 1985년 9월에 민청련이 이적 단체로 규정되고, 7월에 김병곤 상임 위원장이 구속된 데에 이어, 김근태는 8월에 서울 대학교 민주화 추진위 배후 조종 혐의로 연행되었고, 9월에 구속되었다. 당시 김근태는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 기술자 이근안 등으로부터 살인적인 고문을 당하였고, 그 후유증으로 이후에 거동이 불편하게 되었다. 김근태는 이때의 상황을 『남영동』이라는 책으로 출간하여 고문의 참상을 폭로하였다. 2012년에 개봉된 영화 「남영동 1985」 역시 이때의 이야기를 다룬 것이다. 27년이 지나서도 관객들마저 숨 막히게 하는 끔찍한 공포를 온몸으로 받아냈던 김근태였다. 아내 인재근은 당시의 고문 사실을 미국 언론과 인권 단체 등을 통해 전 세계에 폭로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1987년에 김근태 부부가 공동으로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을 수상하였다. 이듬해에는 독일 함부르크 재단이 김근태를 ‘세계의 양심수’로 선정하였다. 김근태는 1987년 6월에 민주화 운동을 감옥에서 맞이해야 했다. 1988년 중반에야 겨우 석방된 김근태는 당시까지의 민주화 운동 세력이 총집결한 전국 민족 민주 운동 연합[전민련]에 가담하여 정책 기획 실장과 집행 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1990년대, 제도 정치권으로의 진입]
1987년대의 폭발적인 민주화 열기를 통해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내기는 했지만, 한국의 민주주의는 아직 김근태의 열망을 채울 만큼은 아니었다. 1990년대의 벽두는 당시 집권 여당이었던 민주 정의당과 야당인 통일 민주당, 신민주 공화당이 3당 합당을 결행하여, 1988년 총선 결과로 만들어진 여소야대 정국을 뒤집는 사태로 시작되었다. 당시 김근태는 전국 민족 민주 운동 연합[전민련]을 중심으로 이를 규탄하는 운동을 주도하였다. 이에 노태우(盧泰愚) 정권은 전민련의 결성 선언문을 빌미로 국가 보안법을 적용하였고, 집행 위원장이었던 김근태는 1990년 5월에 구속되어 1992년 8월까지 다시 복역하였다.
출소 후인 1992년 하반기에 있었던 대선에서 김근태는 ‘민주 대개혁과 민주 정부 수립을 위한 국민회의’를 결성하여 집행 위원장을 맡아 김대중(金大中) 후보를 지지하였다. 김근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3당 합당으로 결성된 민주 자유당의 후보 김영삼(金泳三)이 대권을 차지하자, 1995년에 김근태는 ‘통일 시대 민주주의 국민회의’를 중심으로 한 재야인사들을 이끌고 김대중이 주도한 새정치 국민회의에 입당함으로써 오랜 재야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제도 정치권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김근태는 1996년에 제15대 총선에서 서울 도봉구 갑선거구[쌍문 1동·쌍문 3동·창 1동·창 2동·창 3동·창 4동·창 5동]의 지역구 의원으로 출마하여 38.9%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1997년 대선에서는 수도권 선거 대책 위원회 공동 위원장과 파랑새 유세단 단장을 맡아 정권 교체의 일익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2000년대, 민주 정권의 한 축으로]
새천년은 김근태가 몸담았던 민주화 세력의 집권으로 시작되었다. 김대중과 노무현(盧武鉉)이 내리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김근태 역시 민주 정권의 한 축으로 민주화의 완성을 위해 헌신하였다. 김근태는 2000년과 2004년에 치러진 제16대, 제17대 총선 서울 도봉구 갑선거구에서 내리 당선되었다. 당내에서의 활동도 활발하였다. 2002년 제17대 대선에서는 새천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 참여하였으나 중도에 사퇴하였다. 노무현 정부가 출범한 뒤에는 2004년 7월부터 2005년 12월까지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냈고, 2006년 6월부터 2007년 2월까지는 여당인 열린 우리당의 의장을 역임하였다.
김근태는 2008년 제18대 총선에서 낙선하면서 정치 일선에서 한발 물러서게 되었다. 이 무렵 파킨슨병 확진을 받았는데, 이것이 고문 후유증 때문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 2011년 12월 30일에 지병인 파킨슨병에 여타 합병증이 겹쳐 별세하였다. 김근태의 장례는 민주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한국 민주주의의 성지인 명동 성당에서 추모 미사를 올렸고, 1월 3일에 마석 모란 공원에 안장되었다. 김근태의 묘지 앞에는 ‘민주주의자 김근태의 묘’라는 간단한 비석만이 세워졌다. 그러나 ‘민주주의자’라는 이 한마디는 그의 파란만장한 삶을 담아내는 데에 부족함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