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9000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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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住生活 |
영어공식명칭 | Housing Life |
분야 | 생활·민속/생활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경기도 가평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덕묵 |
[정의]
경기도 가평 지역의 주택과 주거지에서의 삶.
[개설]
주생활은 주택과 그 속에서 인간이 살아가는 생활 환경과 양식을 고려한다. 따라서 주택의 형태나 구조뿐만 아니라 주거 생활을 다루게 된다. 주생활은 지역의 자연환경과 인문, 사회적 환경에 따라, 또한 생업 등에 따라 차이가 있다. 주택의 건축 재료는 그 지역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 우선된다. 따라서 농민들은 흙과 짚을 이용하여 초가집을 짓고 산촌에 사는 화전민들은 통나무와 억세풀, 나무껍질 등을 이용하여 건축을 한다. 이 점은 가평 지역에서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생업은 주택의 구조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농기구, 및 곡식을 저장하는 저장 시설이 있어야 하고 가축을 위한 축사가 있어야 한다. 또한 곡식을 건조하는 건조 시설 등이 요구된다.
[가평 지역 민가의 형태]
주생활의 제반 실태는 가평의 주생활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가평 지역의 마을에서 볼 수 있는 살림집은 한국전쟁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 대부분이다. 한국전쟁 당시 이 지역에서 전투가 치열하고 폭격이 심해 대부분의 주택이 전소되거나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비록 한국전쟁 이후에 다시 지은 집이라고 해도 기본적인 형태는 대체로 이전에 살던 민가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했다. 농가 주택의 형태는 안채를 ‘ㄱ’자 형태로 하고 대문이 있는 아랫채를 'ㅡ'자 형태로 하고 있다. 이런 농가들은 안채의 가장 우측에 건너방, 중앙에 마루, 좌측에는 윗방과 안방 사이를 미닫이문으로 연결한 큰방이 위치하며 'ㄱ'자의 좌측 아래에 해당하는 끝부분에는 부엌이 있다. 아랫채는 중앙에 대문을 사이에 두고 우측은 마굿간, 좌측은 헛간이나 사랑방이 위치한다. 대문 밖 좌측이나 우측에 화장실이 위치한다. 농가 주택들은 이것을 기본으로 하며 집터의 구조 등에 따라 약간의 변형이 나타나며 형편이 나은 집은 ‘ㅁ’자 형태도 보인다.
산촌이 두드러지게 형성된 북면 일대에는 화전민들이 거주하던 통나무로 만든 ‘돗치장’집이 보여진다. 1970년대 초에 화전이 사라지면서부터 돗치장집이 대부분 사라졌으나 지금도 몇 채가 남아있다. 한국전쟁 때 월남한 사람들도 이 집에서 많이 살았는데 돗치장집이 비교적 손쉽게 지을 수 있고 무일푼인데다 소유한 토지가 없는 피난민들이 먹고 살 수 있는 길은 임야에 화전을 일구어 사는 방법밖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가평의 남부 지역인 가평읍이나 청평면 일대에는 돗치장집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이 지역은 평야가 많아 돗치장집보다는 일반적인 민가가 형성되었다.
1970년대 이후에 전기가 들어오고 경제적으로 형편이 좋아지면서 전통적인 농가의 형식이 아닌 양옥식 주택이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주민들은 집을 개조하여 입식 부엌과 화장실을 넣고 화목이 아닌 기름보일러로 난방을 하는 구조로 바꾸는 것이 일반화되었으며 양옥으로 신축을 하는 집도 있었다. 도회지에 살던 외지인들도 가평으로 들어와서 전원주택을 짓고 사는 사람이 생겨났다. 농민들이 지은 양옥은 전통적인 민가에서 볼 수 있는 생산 도구의 저장이나 곡물의 창고 기능 등을 겸하는 경우도 있지만 농사를 짓지 않는 외지인이나 주민들의 양옥은 휴식과 수면, 가족 사이의 교류를 위한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농민들의 민가 역시 우경(牛耕) 대신 기계화되면서 소를 키우던 마굿간이 소용없게 되어 이전과는 다소 변화된 모습을 볼 수 있다. 오늘날 가평에는 전통적인 농가를 헐고 신축한 양옥집, 농가의 안채는 양옥을 신축하고 아랫채는 전통적인 'ㅡ'자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형태, 외형은 전통적인 농가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내부를 개조한 형태가 공존하고 있다. 그러나 점차 전통적인 주택은 더욱 줄어들고 있으며 반면 양옥은 늘어나고 있다.
[주생활 사례]
1. 가평군 북면 도대리 양짓말 김춘수 집
김춘수[1938년생] 집은 18세 때 지은 옛집과 현재 살고 있는 집 두 채가 있다. 현재 살고 있는 집은 옛집의 사랑채를 없애고 2004년에 양옥을 신축하였다. 현재의 차고는 옛집의 마굿간이 있던 자리이다. 소 여물을 보관하던 장소도 지금은 없애고 옛집의 부엌 뒤에 새로 창고를 지어 필요한 물건을 보관하고 있다. 주택 외부의 화장실은 옛집 마당 끝에 있는데 거름을 생산하기 위해 그대로 두고 신축한 집 내부에 욕실과 화장실을 만들었다. 옛집에 거주할 때는 안방에 할머니와 손자가 거주하고 윗방에 김춘수 부부가 거주했다. 사랑방은 시동생이 거주하다가 가평읍으로 나갔다. 신축 양옥은 방이 3개 있다. 안방은 부부가 사용하고 다른 방 하나는 시어머니, 다른 하나는 대학에 다니는 둘째 아들이 집에 오면 사용한다. 옛집에는 아궁이에 불을 때어 사용하였다. 부엌에는 솥이 세 개가 있었는데 가장 작은 솥은 밥을 하고 중간 것은 빨래를 삶는데 사용했다. 가장 큰 것은 두부를 만들거나 물을 데울 때 사용하였다. 현재 양옥집에 거주하지만 메주를 쑤기 위해 콩을 삶을 때나 고추장을 쑨다거나 할 때는 옛집 아궁이를 사용한다. 현재 거주하는 양옥 부엌은 ‘ㄱ’자형 싱크대가 있으며 개수대쪽으로 냉장고를 보관하고 가스렌지가 있는 쪽은 옛집과 연결되는 문이다. 이 문을 열면 식재료를 보관한 창고가 있다. 장독대는 마당의 왼편 구석에 있다. 자식들이 필요한 저장 음식을 가져갈 때는 이곳에서 퍼낸다. 장독대에는 제일 큰 간장 항아리와 된장 항아리, 고추장 항아리가 있다. 된장은 한 해를 묵혀서 쓰는 것이 좋아 두 개를 사용한다. 2년째가 되면 한 해 묵은 된장을 새 된장과 버무려 놓는다. 그러나 그렇게 된장이 남는 경우는 드물다. 식사는 부엌과 거실 사이에 놓인 교자상에서 한다. 식탁보다 앉아서 먹는 교자상이 편하기 때문에 식탁은 설치하지 않았다.
2. 가평군 북면 제령리 상촌마을 신영희 집
신영희[1922년생]는 시집을 온 후 몇 해 동안 큰집에서 살다가 20세에 제령리 막골로 분가하였으나 집이 없어 남의 집 곁방살이를 8년간 하였다. 남의 집 살이가 싫어 산에서 몰래 나무를 베어 집을 지었다. 그 집에서 살다가 상촌에 있는 집을 구입하여 현재까지 살고 있다. 이 집은 원래 아랫방, 윗방, 건넌방, 부엌만 있던 것을 이사 온지 3년이 지난 후 새로 마루를 놓고 행량채도 지었다. 안방과 건넌방 사이의 마루 자리는 원래 흙바닥이었으며 행랑채를 짓기 전 마구간은 거의 쓰러져 가는 상태였고 문도 싸리깽이로 대강 얽어놓은 것이라 행랑채로 마루와 광, 나무대문을 세웠다. 소마구에는 ‘쇠귕’을 달아서 소를 키웠고 쇠죽은 건넌방 부엌 아궁이에 큰솥을 걸어서 만들었다. 부엌에는 붙박이로 달아둔 찬장이 있고 집의 뒤꼍에는 굴뚝과 대추나무가 있다. 담장은 1990년대 후반에 세웠고 뒷간은 대문 밖 원래 있던 자리에 이사 오면서 지었다. 본채 지붕에 달린 함석창은 1990년대 초에 달아놓은 것인데 연탄을 사용하는 집에서는 다 삭아 없어지지만 이 집은 나무로 난방을 하기 때문에 아직 유지되고 있다.
3. 가평군 가평읍 금대리 장일환 집
장일환[1917년생]은 1970년대까지 초가집에서 등잔불을 켜고 살았다. 전기는 1980년대에 들어왔다. 1980년대 말에 지금의 집터로 옮겨서 슬레이트 집을 지었다. 사랑채는 2000년대 초에 부모님이 큰형님 댁에서 오셔서 새로 지은 양철집이다. 이 집은 처음에는 ‘ㄱ’자형이었는데 사랑채를 추가로 지은 후 튼 ‘ㅁ’자형 구조가 되었다. 방은 모두 4개이며 장씨 아들 부부, 손녀 딸, 장일환 부부가 사용하며 나머지 하나는 손님이 오면 기거한다. 사랑채에는 노인들의 편리를 위해 실내에 화장실을 두었으나 안채에는 세면실만 있고 화장실은 바깥에 있다. 보일러는 기름보일러를 사용하고 있다. 집의 생업 공간인 마구간은 아직 그 형태가 처음 집을 지었을 때와 같이 있으며 1990년대 말부터 소를 키우지 않고 있다. 과거에는 농사에 소를 이용하였지만 지금은 기계로 하기 때문에 농가에서 소를 키우지 않아도 된다. 화장실과 우물 사이에 닭을 기르던 계사가 있으나 지금 비워져 있다. 우물은 마을 아래에서 지금은 묻혀 버린 우물에서 호스를 묻어 끌어온다.
4. 가평군 가평읍 복장리 조규팔 집
복장리의 민가는 농가형과 비농가 전원주택형으로 볼 수 있다. 비농가 전원주택형은 첫째, 서울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 지은 전원주택이다. 이들은 마을 사람들과 특별히 교류를 하지는 않지만 마을에 일이 생겨서 돈을 걷거나 하는 경우에는 빠지지 않는다. 다음은 마을에서 살다가 직장 때문에 서울이나 가평 등지에 나가 살다가 신축을 하여 다시 마을로 들어온 경우이다. 신축 양옥들은 2층인 경우도 많다. 복장리 조규성의 주택은 1층은 거실과 연결된 부엌과 두 개의 침실과 화장실 한 개가 있으며 2층은 방 두 개와 작은 마루, 화장실이 있다, 비농가 전원주택형인 경우에도 간단히 텃밭을 활용할 수는 있으나 전업 농가형 민가와는 주택구조상 기능에서 차이가 있다. 농가형 민가는 농업에 용이한 구조를 가진다. 조규팔[1939년생]의 집은 직접 지은 집이다. 조규팔의 조부와 부친, 그리고 본인은 모두 목수이다. 집은 1976년에 지었으나 비교적 전승되어 오는 방식을 유지하였으며 ‘ㄱ’자형 구조를 지니고 있다. 농가형 주택인 이 집은 농업과 관련된 외양간, 소죽을 끓이는 가마솥과 아궁이가 있었으나 농업이 기계화되면서 외양간은 헛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주택 내부는 윗방과 욕실 사이에 마루가 있고 욕실 앞에 부엌이 있고 그 앞에 건넌방이 있다. 부엌은 좁기 때문에 큰일을 할 때는 마당에서 한다. 마당에 우물이 있고 이동식 가스렌지가 있다. 창녕 조씨 문중의 시제를 지낼 때 여기에서 음식을 조리한다. 조규팔은 2004년부터 문중의 금대리 시제 도가를 맡았다. 모든 음식은 조규팔 집에서 준비한다. 예전에 사용하던 재래식 부엌은 물건을 사용하는 장소가 되었다. 재래식 부엌은 안방에 군불을 때거나 가마솥에 물을 끓일 때 사용한다. 고추장, 메주, 두부를 만들 때도 아궁이를 사용한다. 1960년대까지 마을의 공동 우물을 사용할 때는 40여 미터 떨어진 윗말 우물을 사용했다. 장독대는 창고 뒤에 있다. 옛날처럼 장독이 많지 않다. 식구가 줄면서 장독이 커야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아직도 자식들에게 저장 음식인 고추장, 된장, 간장 등을 보내 줘야 하므로 장독대가 있어야 편하다. 식탁이 있지만 음식은 원형의 교자상에서 먹는다. 이 밥상은 조규철의 부인이 시집을 올 때 혼수로 가져온 것이다.
5. 돗치장집
돗치장집은 화전민이 살던 집이다. 산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나무를 쌓아 벽면을 만든 것이 특징이다. 참나무를 잘라서 장작을 쌓듯이 쌓은 후 나무 사이의 틈에는 진흙을 발라서 짓는다. 지붕은 나무를 쭉 깔아 고물을 만든 뒤 그 위에 흙을 바르고 다시 고물을 눌렀다. 지붕은 억새풀을 베어다가 새끼로 엮어서 덮었다. 이것은 매년 교체해야 한다. 전기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방안에 고콜을 만들어 관솔을 피워놓고 살았다. 고콜을 만들면 연기가 밖으로 빠져나가도록 돌을 쌓아서 굴뚝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