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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900576
한자 愼居寬
영어공식명칭 Shin Geogwan
이칭/별칭 율이(栗耳),독재(獨齋),공간(恭簡)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 하색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창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498년연표보기 - 신거관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22년 - 신거관 생원시 합격
활동 시기/일시 1525년 - 신거관 식년시 급제, 성균관 학유 제수
활동 시기/일시 1534년 - 신거관 이조 정랑 제수
활동 시기/일시 1550년 - 신거관 평해로 유배
활동 시기/일시 1555년 - 신거관 여주목사 부임
몰년 시기/일시 1564년연표보기 - 신거관 사망
부임|활동지 경기도 - 경기도
부임|활동지 여주목 - 경기도 여주시
유배|이배지 평해 - 경상북도 울진군
묘소|단소 신거관 묘 -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 하색리 지도보기
성격 문관
성별
본관 거창
대표 관직 호조 판서

[정의]

경기도 가평군에 묘가 있는 조선 전기 문신.

[가계]

신거관(愼居寬)[1498~1564]의 본관은 거창(居昌)이다. 자는 율이(栗耳)이고, 호는 독재(獨齋)이다. 시호는 공간(恭簡)이다. 증조할아버지는 대사간을 역임한 신후갑(愼後甲)이고, 할아버지는 판관(判官) 신자수(愼自修)이며, 아버지는 직장(直長)을 지낸 신극정(愼克正)이다. 어머니는 성균관 사예(司藝)를 지낸 조충손(趙衷孫)의 딸이다.

[활동 사항]

신거관은 1522년(중종 17)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525년에는 식년시 을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학유(學諭)에 제수되었다. 이후 봉상시(奉常寺)의 봉사(奉事)와 직장(直長)을 거쳐 호조 좌랑에 재임하였는데, 나라의 재정을 정밀하게 처리하였다고 한다. 당시 호조 판서였던 신공제(申公濟)는 신거관에 대해 앞으로 큰 일을 할 인물이라고 평하였다. 1531년 사헌부 지평(持平)과 사간원 헌납(獻納) 등 주요 대간(臺諫) 관직을 역임하였다. 1534년에는(중종 29) 문관의 인사를 실무적으로 관장하는 책임자인 이조 정랑을 역임하였다.

그 후 사헌부 집의(執義)와, 의정부 검상(檢詳), 홍문관 부교리(副校理)를 지내고 왕명의 출납을 책임지는 도승지에 올랐다. 외직으로는 경기도관찰사를 역임하였고, 내직으로 돌아온 뒤에는 사헌부 대사헌을 거쳐 호조 판서에 이르렀다.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乙巳士禍) 당시에 윤원형(尹元衡)의 탄핵을 받아 1550년 평해(平海)[지금의 경상북도 울진군]로 유배되었다. 1551년에 양주로 이배되었다가 1553년 풀려났다. 1555년(명종 10)에는 여주목사로 다시 등용되었다. 이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명종실록』 신거관 졸기(卒記)는 신거관에 대해 “판서의 반열에 올랐으면서도 옷은 비단옷을 즐기지 않았고 음식은 맛있는 것을 구하지 않아 별다른 부귀한 모습이 없었다.”, “어머니가 죽자 거관이 나이가 이미 늙었으나 예(禮)로 집상(執喪)하니 사람들이 그의 효성에 감복하였다.”라고 평하였다.

[묘소]

신거관의 묘는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 하색리 거창 신씨 묘역에 있다. 신도비의 글은 홍섬(洪暹)이 지었는데 마모가 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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