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9005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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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元天錫 |
영어공식명칭 | Won Cheonseok |
이칭/별칭 | 자정(子正),운곡(耘谷)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기도 가평군 청평면 삼회리 |
시대 |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창현 |
출생 시기/일시 | 1330년 - 원천석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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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주|이주지 | 운곡암 - 경기도 가평군 청평면 삼회리 |
묘소|단소 | 원천석 묘 - 강원도 원주시 행구동 |
사당|배향지 | 칠봉서원 - 강원도 원주시 호저면 산현리 |
성격 | 학자 |
성별 | 남 |
본관 | 원주 |
대표 관직|경력 | 진사 |
[정의]
고려 말 조선 초 경기도 가평 지역에 은거한 학자.
[가계]
원천석(元天錫)[1330~?]의 본관은 원주(原州)이다. 자는 자정(子正)이고, 호는 운곡(耘谷)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원시준(元時俊)이고, 할아버지는 정용위(精勇衛) 별장(別將) 원열(元悅)이며, 아버지는 종부시(宗簿寺) 영(令) 원윤적(元允迪)이다. 부인은 원성 원씨(原城 元氏)이다.
[활동 사항]
원천석은 1360년(공민왕 9)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고려 말의 문란함을 보고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한때 이방원(李芳遠)의 스승이었던 연고로 이방원이 왕으로 즉위한 후 은총을 내리려 하였으나 치악산에 은거하며 피하였다고 한다. 태종은 대신 원천석의 아들 원형(元泂)을 기천(基川)[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의 수령으로 임명하여 원천석에게 은거의 명분도 주고 아들에게 물질적 봉양을 하도록 배려하였다. 조선 시대 선비들은 원천석·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를 마치 은(殷)나라 세 명의 인자(仁者)와 같이 평가하였다. 원천석이 한때 은거하며 지었다는 운곡암이 경기도 가평군 청평면 삼회리에 있다.
[학문과 저술]
원천석의 저술로 『운곡시사(耘谷詩史)』와 「회고가(懷古歌)」가 있다. 『현종개수실록』을 보면 원천석이 지은 『사고(史稿)』 6권이 남아있다고 한다. 고려 말 조선 초의 여러 사건을 자세히 기록하였는데, 내용을 볼 수 없도록 풀로 붙여 놓았다고 한다. 자손들도 원천석의 유언을 받들어 열어보지 않았는데, 유실된 것이 많다고 한다.
[묘소]
원천석의 묘는 강원도 원주시 행구동에 있다. 강원도 기념물 제75호이다. 묘역에는 1670년(현종 11)에 세운 묘갈이 있다.
[상훈과 추모]
원천석은 1624년(인조 2) 강원도 원주시 호저면 산현리에 있던 칠봉서원(七峯書院)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