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9006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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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敬達 |
영어공식명칭 | Gim Gyeongdal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기도 가평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조성운 |
출생 시기/일시 | 1849년 3월 15일 - 김경달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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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896년 2월 8일 - 김경달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80년 - 김경달 대통령표창 서훈 |
추모 시기/일시 | 1991년 - 김경달 건국훈장 애국장 서훈 |
출생지 | 김경달 출생지 - 강원도 춘천시 신동면 팔미리 |
거주|이주지 | 김경달 거주지 - 강원도 춘천시 신동면 팔미리 |
성격 | 의병 |
성별 | 남성 |
대표 경력 | 유중락·최삼여 의진 참여 |
[정의]
개항기 경기도 가평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
[가계]
김경달(金敬達)[1849~1896]은 1849년 강원도 춘성군 신동면 팔미리 70[현 춘천시 신동면 팔미리]에서 태어났다.
[활동 사항]
김경달은 춘천부의 포군으로, 평소 ‘김효자’로 불릴 정도로 효도와 우애가 극진한 것이 널리 알려졌다.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일제의 내정 간섭으로 단발령이 내려지자 전국적으로 의병이 봉기하였는데, 김경달도 의병에 뜻을 두었다. 이때 유중락(柳重洛), 이만응(李晩應) 등을 중심으로 천여 명이 춘천부에 모여 습재 이소응(李昭應)을 대장으로 추대한 춘천 의병부대가 형성되었다. 이소응은 “…관망하여 곧 호응하지 않는 자나 적의 편에 붙어서 군정(軍情)을 방해하는 자가 있다면 이것은 모두 이적 금수(夷狄禽獸)의 앞잡이요, 난신 적자(亂臣賊子)의 도당이니, 단연 군법을 시행하여 먼저 베고 후에 보고할 것이다.” 라는 격문을 전국 8도에 보냈다. 김경달은 이에 응하여 유중락의 의병부대에 들어가 가평·춘천·홍천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그러나 춘천 의병부대는 선비들이 대부분 구성되어 있어서 전략·전술 에 익숙하지 못하였다. 또 신우균(申羽均), 김귀현(金龜鉉) 등이 지휘하는 관군의 공세가 급격해졌고, 성 안에서 관군과 내통하는 자가 생겨 점차 의병부대의 형세를 유지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에 이소응은 병력을 증강하기 위해 직접 지평군수(砥平郡守) 맹영재(孟英在)를 찾아가 협상을 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2월 17일 제천의 의암(毅庵) 유인석(柳麟錫) 의병부대로 들어갔다. 이때 김경달은 최삼여(崔三汝)의 지평 의병부대에 편입되었다. 이들은 행군하여 양근(楊根)의 미원(迷源)까지 진출하였다. 이때 맹영재가 사망하자, 맹영재의 아들이 의병장 최삼여를 죽이고 경군의 활동을 도왔다. 김경달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끝까지 총을 쏘다가 결국 경군에게 생포되었다. 경군이 김경달의 용감성에 감탄하며, “네가 만일 우리편이 된다면 죽이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김경달은 큰 소리로 “나라의 원수를 갚고, 형체를 보전하기 위하여 나섰던 것인데 불행히 잡혔으니 죽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어찌 뜻을 고칠 수 있느냐.” 하였다. 김경달은 총살로 순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김경달은 1980년 대통령표창을 받았으며,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