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9007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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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秉植 |
영어공식명칭 | I Byeongsik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기도 가평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조범성 |
출생 시기/일시 | 1861년 9월 12일 - 이병식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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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15~16일 - 이병식 북면 만세시위 참여 |
몰년 시기/일시 | 1938년 5월 7일 - 이병식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2년 - 이병식 대통령표창 서훈 |
출생지 | 이병식 출생지 - 경기도 가평군 북면 목동리 920 |
거주|이주지 | 이병식 거주지 - 경기도 가평군 북면 목동리 920 |
활동지 | 이병식 활동지 - 경기도 가평군 북면 일대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성 |
대표 경력 | 북면 만세시위 참여 |
[정의]
일제 강점기 경기도 가평군 북면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이병식(李秉植)[1861~1938]은 가평군 천도교의 중심인물로 1919년 가평군 3·1운동 만세시위 때 자문역할을 맡았으며, 일경에 체포되어 징역 8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가계]
이병식(李秉植)[1861~1938]은 1861년 9월 12일 가평군 북면 목동리 920에서 태어났다. 구체적인 가계는 알려지지 않았다.
[활동 사항]
이병식은 학문에 조예가 깊었으며, 서당 훈장으로 활동했다고 전한다. 1907년 무렵 신석주(申錫周), 정천수(鄭天洙), 이계승(李繼承), 장성환(張星煥) 등과 함께 천도교에 입교하였으며, 가평교구장을 역임하는 등 가평 천도교도의 중심적 인물이었다. 가평교구장을 그만둔 뒤에도 중앙총부와 연락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1919년 전국에서 만세시위가 전개되자 이병식도 가평군 북면 주민들과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가평군 북면 목동리에 사는 이규봉(李圭鳳)은 가릉보성학교(嘉陵普成學校)에서 한문교사를 하였으며 이병식과는 시우(詩友)이다. 이규봉은 고종 인산일을 맞아 서울로 상경하던 중 서울에서 만세시위를 목격하고, 서울에 있는 제자들과 만나 3·1운동에 대한 배경과 경위를 듣게 되었다. 이규봉은 가평 지역에 만세시위를 전파할 뜻을 가지고, 「독립선언서」 2매와 『독립신문』 1매를 가지고 가평으로 돌아왔다. 3월 7일 이규봉은 아회(雅會)를 열고, 장기영(張基英), 정성교(鄭聖敎), 이만석(李萬錫), 정재명(鄭在明), 이병찬(李炳贊) 등 20여 명과 함께 만세시위를 논의하였다. 이들은 거사일을 3월 15일로 정하고, 시위에 쓰일 태극기와 통문을 준비하는 한편 천도교 및 기독교인들과 힘을 합쳐 만세시위의 상황을 전하고 참여할 것을 적극적으로 독려하였다. 그리하여 태극기 약 1,800개와 500여매의 비밀통문이 제작되었으며, 3월 14일 밤 정기복(鄭基福), 정천수(鄭天洙), 최인화(崔仁和) 등이 이를 북면 각 동리에 배포하며 만세시위에 참여할 것을 독려하였다. 이병식은 만세운동에 자문역할을 맡았다.
3월 15일 오전 9시경 약 50여 명의 주민들이 북면의 성황당에 먼저 집결하여 만세를 부른 뒤 북면사무소 앞에 이동하며 태극기를 휘두르며 만세를 불렀다. 이어 가평 읍내로 이동하여 군청과 학교, 금융조합 등을 돌며 수백 명의 군중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헌병들이 이를 제지하고 해산명령을 하였으나 이에 불응하였으며, 저녁이 되어서야 해산하였다. 이에 일본경찰은 주도인물에 대한 체포에 나서, 이규봉·이윤석 부자와 최기선·최인화·최종화·최용화 등이 피체되었다. 이병식 역시 만세시위에 참가한 뒤 돌아왔다가 이튿날 새벽에 체포되었다.
주도인물들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들리자, 체포되지 않았던 장기영, 정성교 등이 이들을 탈환하기 위해 3월 16일 오전에 200여명의 주민들과 함께 가평헌병분견소를 향해 이동하였다. 북면 목동리 당고개를 지나던 중 소식을 듣고 출동한 헌병들과 맞닥뜨려 돌을 던지고 격투를 벌였다. 이로 인해 장기영, 정성교, 이교성(李敎聖), 홍종선(洪鍾先) 등 전날 체포되지 않은 인물들도 피체되어 그 수는 수십명에 이르렀다. 이들 가운데 20여명이 재판에 넘겨졌는데, 이병식 역시 보안법위반 및 소요죄로 기소되어 같은 해 4월 26일 징역 8월형을 언도받았다. 이에 항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38년 5월 7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이병식은 1992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