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9007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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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胤錫 |
영어공식명칭 | I Yunseok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기도 가평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조범성 |
출생 시기/일시 | 1894년 2월 1일 - 이윤석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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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07년 - 이윤석 가릉보성학교 졸업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15일 - 이윤석 북면 만세시위 참여 |
수학 시기/일시 | 1922년~1926년 - 이윤석 협성신학교 수학 |
활동 시기/일시 | 1933년 - 이윤석 십자가당 중앙집행위원회 전도위원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945년 - 이윤석 건국준비위원회 강원도위원회 총무 역임 |
몰년 시기/일시 | 1953년 4월 4일 - 이윤석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77년 - 이윤석 대통령표창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이윤석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출생지 | 이윤석 출생지 - 경기도 가평군 북면 목동리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성 |
대표 경력 | 북면 만세시위 주도 |
[정의]
일제 강점기 경기도 가평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이윤석(李胤錫)[1894~1953]의 아버지는 가평군 북면 만세시위를 주도했던 이규봉(李圭鳳)이다. 1894년 2월 1일 경기도 가평군 북면 목동리에서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슬하에 5형제를 두었다.
[활동 사항]
이윤석은 어릴 때 사서삼경 위주의 한학 교육을 받다가 아버지가 한문교사로 있던 가릉보성학교(嘉陵普成學校)에 입교하였다. 1907년 가릉보성학교를 졸업한 후 양주에 있는 양잠강습소에 입교하여 수료하였다. 16세에 류제하(柳濟河)와 혼인하였으며, 부평의 양잠강습소에서 교사로 일하다가 20세에 양평에 있는 육영의숙(育英義塾)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윤석의 아버지 이규봉은 1919년 3월 1일 고종의 인산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을 방문했다가 만세시위를 목격하고, 서울에 있던 이규봉의 제자 정한교(鄭漢敎), 민영순(閔泳純) 등을 만나 자초지종을 들었다. 이규봉은 제자들에게 받은 「독립선언서」 1매와 서울 시내에서 받은 「독립선언서」 1매, 『독립신문』 1매를 가지고 가평으로 돌아왔다. 이규봉은 장남인 이윤석과 제자 정흥교(鄭興敎) 만나 서울에서 보고 들은 상황을 전하고, 가평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하였다. 이규봉은 3월 7일 아회(雅會)를 열어 주민들을 불러모았다. 밤이 되자 이규봉은 주민 20여명에게 파리강화회의를 통해 식민지 국가들이 독립했고, 경성을 비롯한 각지에서 독립만세를 불렀다는 상황을 전했고, 여기에 모인 장기영(張基英), 정성교(鄭聖敎), 이만석(李萬錫), 정재명(鄭在明), 이병찬(李炳贊) 등 19명이 이 계획에 찬동하였다. 또한 만세시위에 사용하기 위해 정흥교와 함께 옥양목으로 태극기를 만들고, 각 동리에 돈을 주어 종이로 태극기를 만들게 하였다. 그리하여 대략 1,800여개의 태극기와 500여매의 비밀통문을 제작하였다. 이들은 양력 3월 15일 오전 9시에 집합하라는 내용을 전달하였다. 이윤석은 이곡리(梨谷里) 주민들에게 직접 거사의 취지를 알리고 만약 참여하지 않으면 조선인이 아니라고 말하며 주민들의 참여를 독려하였다.
3월 15일 오전이 되자 이윤석은 다른 주도자들과 함께 북면사무소에 도착하였고, 미리 소식을 접한 북면 주민 수백 명도 이에 찬동하여 만세를 불렀다. 사전에 준비한 태극기를 앞장세우고 가평군청이 있는 가평읍내로 이동하면서 만세를 외쳤다. 그러나 귀가 후 이윤석은 이규봉을 비롯한 최기선(崔基善), 최인화, 최종화, 최용화 등 주도인물과 함께 피체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장기영·정성교·홍종선(洪鍾先)·이교성(李敎星)·장순현(張順賢)·이영헌(李英憲) 등은 북면 주민 200여명과 함께 체포된 이윤석 등을 방면하기 위해 이튿날 아침 북면 목동리의 성황당에 집결하였다. 이들은 목동리에서 헌병분견소로 가던 중 당고개에서 헌병과 만나 격투를 벌였다. 이후 이윤석과 북면 만세시위를 주도한 인물들은 소요죄 및 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되었고, 이윤석은 1919년 4월 26일 2년형을 언도받았다. 이윤석은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경성복심법원에서 공소가 기각되었다.
이윤석은 1921년 6월 21일 세례를 받고, 1922년부터 1926년까지 대한감리회의 협성신학교(協成神學校)를 다녔다. 이후 강원도 홍천으로 가서 남궁억(南宮檍)이 설립한 모곡교회(牟谷敎會)의 담임목사에 부임하였으며, 기독교계 독립운동 단체인 십자가당에서 활동하였다. 십자가당은 1933년 4월 하순 모곡교회의 목사 및 신자들이 조직한 비밀결사 조직이다. 이윤석은 ‘공존공향(共存共享)의 지상천국’을 건설하기 위해 십자가당 중앙집행위원회의 전도위원을 맡았다. 그러나 이들을 주목하던 일본 경찰에 의해 이윤석과 십자가당원은 피체되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옥고를 치렀다. 이후 장단교회(長湍敎會), 가평교회(加平敎會)의 목사를 역임하다 광복 이후 건국준비위원회 강원도위원회 총무를 맡았다.
[상훈과 추모]
이윤석은 1977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