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900740 |
---|---|
한자 | 李正魯 |
영어공식명칭 | I Jeongro |
이칭/별칭 | 대재,사계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가평군 청평면 청평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
집필자 | 임현채 |
출생 시기/일시 | 1838년 12월 2일 - 이정로 출생 |
---|---|
몰년 시기/일시 | 1923년 - 이정로 사망 |
출생지 | 이정로 출생지 - 경기도 양평군 |
묘소|단소 | 이정로 묘소 - 경기도 가평군 청평면 청평리 |
성격 | 문신|친일반민족행위자 |
성별 | 남 |
본관 | 전의 |
대표 관직 | 성균관 대사성|이조참의 |
[정의]
경기도 가평군에 묘가 있는 조선 후기 문신이자 친일 인사.
[가계]
이정로(李正魯)[1838~1923]의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대재(大哉), 호는 사계(沙溪)이다. 할아버지는 이호민(李好敏), 아버지는 증 의정부 참정(贈議政府參政) 이근오(李根五)이며, 생부는 이근두(李根斗)이다. 어머니는 김복순(金復淳)의 딸이다. 1838년 12월 2일 경기도 양평에서 태어났다.
[활동 사항]
이정로는 1858년(철종 9) 병과에 급제하였다. 주로 삼사에서 활동하여 승정원 가주서(假注書)·초계문신(抄啓文臣)·홍문관 부교리(副校理)·사간원 정언(正言)·헌납(獻納)·홍문관 응교(應敎) 등을 역임하였고, 1860년(철종 11)에는 용강현령(龍岡縣令)에 부임하였다. 1863년(철종 14)에는 철종실록 낭청(郞廳)으로 임명되었으며 이듬해에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1870년(고종 7)에는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을 맡았으며, 승지(承旨) 및 예조·이조 참의를 거쳤다. 1875년에 외직으로 경주부윤·충주목사로 부임하였으며, 한성부 좌윤을 지냈다.
1880년에는 이조참판(吏曹參判), 1882년에는 이조참의(吏曹參議)로 감생청(減省廳)에 참여하여 관원 수 감축 등을 주장하였으나, 청의 압력으로 곧 실각하였다. 1890년에는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오르고, 1891년에는 도승지(都承旨)가 되었고 김병시(金炳始) 등의 수구파 정부에서 예조판서·의정부 좌참찬을 지냈다. 1892년에는 자헌대부(資憲大夫)를 받았고, 1893년 동지정사(冬至正使)로 청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하였다.
1894년에는 형조판서·이조판서가 되었으며, 이듬해 유진만(兪鎭萬)과 함께 복수청(復讐廳)을 설치하고 을미사변에 관계된 자들을 정법(正法)으로 다스릴 것을 상소하였다. 그 외에도 약원제조에서 복무하였다. 1896년에는 궁내부 특진관(特進官)이 되었고, 소두(疏頭)가 되어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환궁할 것을 간청하는 상소를 여섯 차례 올렸다.
1897년 정헌대부(正憲大夫)의 품계를 받았으며 이듬해에는 비서원경이 되었다, 이때 산릉도감 제조로 있으면서 능 관리를 소홀히 한 죄목으로 철도(鐵島)에 15년간 유배처분을 받았으나 곧 풀려났다. 1899년 태의원경(太醫院卿), 장례원경(掌禮院卿)에 전임하였다.
1902년 종1품을 받고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랐으며, 1904년 시종원경이 되고 1906년 판돈녕사사에 임명받았으며 1907년에는 70세로 기사(耆社)에 들어갔다. 1910년 8월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한일합방이 되었을 때 그 공로를 인정받아 일제로부터 정5위 남작을 수여받았다. 1912년 8월 1일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1923년 병으로 사망하여 가평에 묻혔으며, 이정로의 아들 이능세(李能世)가 작위를 세습하였다. 일제의 조사에 따르면 이정로는 노론계 서인이며 사망 당시 자산은 3~4만원 내외였다.
[묘소]
이정로의 묘는 가평군 청평면 청평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