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9011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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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전패 公所 |
분야 | 종교/기독교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경기도 가평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박주영 |
[정의]
개항기 경기도 가평 지역에 있었던 천주교 공소.
[개설]
전패 공소의 실제에 관한 직접적인 기록은 발견할 수 없다. 그러나 『춘천 죽림동 본당 70년사』에서 제9대 죽림동 본당 주임 사제였던 신성우[1893~1978] 신부가 1983년 3월 10일 가평에서 출생한 기록은 당시 가평에 천주교인들이 존재했음을 추정할 수 있는 간접적인 증거 자료가 되고 있다. 1893년 가평 지역에서는 전패 공소가 유일한 천주교 공동체였다. 따라서 신성우 신부의 부모, 가족은 전패 공소에 소속되었던 천주교 신자들로 추정된다.
[변천]
전패 공소의 신자 수는 사목(司牧) 보고서에 의하면, 1885년 12월에 24명이었으며, 1894년 12월에는 48명까지 증가했으나, 1898년 28명의 기록을 끝으로 신자들의 소식이 끊어졌다고 한다. 아마도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서 현재 연인산[경기도 가평군 하면 상판리, 북면 백둔리, 가평읍 승안리 경계에 있는 산/해발 1,068m]으로 불리는 곳의 깊은 산골에 정착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 후 상황은 알려진 바가 전혀 없다.
[의의와 평가]
신성우 신부는 경기도 가평에서 태어나 7살 때 풍수원 본당 관내인 강원도 횡성군 서원면 검두로 이사하였다고 한다. 이를 통해 신성우 신부와 그 가족들은 신부가 출생한 1893년 무렵부터 7살이 되는 1900년까지 가평 지역에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신성우 신부 집안은 할아버지 때부터 천주교를 믿었고, 아버지와 둘째 형 신비우가 대를 이어 공소회장을 맡아 활동했다고 한다. 이를 통해서 전패 마을에는 이미 100여 년 전에 자식을 신학교에 보낼 정도로 독실한 천주교 신자들이 살았음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신성우 신부의 가족이 전패 마을로 오기 전부터 그곳에 천주교 신자들의 공동체인 공소가 있었던 만큼, 이들이야말로 가평 지역의 천주교 역사를 서술하는 데 있어, 시작을 이야기할 수 있는 인물들이라는 점에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