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9000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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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政治 |
영어공식명칭 | Politics |
분야 |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경기도 가평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황금희 |
[정의]
경기도 가평 지역에서 국가 권력의 획득·유지·행사를 둘러싸고 이루어지는 개인 또는 집단 간의 조정 과정.
[개설]
좁은 의미로 정치는 정치가들이 국가를 위해 행하는 활동이라고 하며 넓은 의미에서는 사람들 사이에 서로 다른 생각이나 혹은 다툼이 생겼을 때 이것을 해결하는 과정을 정치라고 말한다. 특히 공동생활을 영위하는 인간 사회에서는 자원의 획득과 배분을 둘러싼 대립이나 분쟁을 조정하기 위한 주요 수단으로 정치를 사용하고 있다. 경기도 가평 지역에서의 정치는 주로 국가의 정치 형태 변화와 구성에 따라 변화되면서 국가 기구에 파견할 대표자를 선출하는 선거 활동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제1~3공화국 ]
제헌 의원 선거 결과 대한독립촉성국민회와 한국민주당이 다수의 의석을 차지하였으며, 뒤를 이어 대동청년단 12석, 조선민족청년단 6석, 기타 정당 단체가 13석, 무소속 85석이었다. 선거 후 한국민주당 소속 의원들은 사회단체 소속 의원과 무소속 의원들을 결집시키기 위해 노력하면서 가장 많은 의석을 획득한 당이 되었다. 1948년 제헌 국회 의원 총선거가 실시되었고 이 시기만 해도 정당의 기능이나 역할에 대한 이해의 정도가 낮았고, 소속 정당에 대한 충성심이나 정당에 소속감이 생겨나기 전이라 선거 후 쉽게 소속 정당을 옮기거나 하는 의원들이 많았다. 가평군에서는 제헌 국회 의원 선거 당시 홍익표가 무소속으로 단독 출마하여 무투표 당선되었다.
제2대 국회 의원 선거는 제헌 국회 의원의 임기 만료 2년 후인 1950년 5월 30일에 실시되었다. 제2대 국회 의원 선거는 한국 정부가 주관하여 시행한 최초의 국회 의원 선거로서 제헌 국회에서 제정된 국회 의원 선거법이 적용되었으며 이 선거에서는 제헌 의원 선거에 불참하였던 중간파 세력과 혁신 세력이 참여함으로써 각 정치 세력이 참가한 선거로 기록되었다. 당시 가평군의 무소속 13명과 대한청년당 1명, 국민회 1명이 출마하여 총 15명의 후보들이 경쟁하였으나 15명의 입후보자 중 무소속으로 출마한 홍익표 의원이 다시 재선되면서 제2대 국회에서 국회운영위원장을 역임하였다.
제2대 대통령 선거는 1952년 8월 5일 실시되었으며 선거 결과 자유당의 이승만 후보가 유효 투표총수 702만 684표의 74.6%인 523만 8769표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무소속의 조봉암 후보는 79만 7504표, 또 다른 무소속 후보인 이시영 후보는 76만 4715표, 마지막 신흥우 후보는 21만 9696표를 획득하였다. 같은 날 실시된 부통령 선거에서는 무소속의 함태영 후보가 다른 8명의 후보들을 제치고 294만 3813표를 획득하여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러한 분위기를 반영하여 가평군에서는 대통령 선거에서 총 선거인수 25,998명 중 24,309명이 투표에 응함으로서 93.5%의 높은 투표율을 보였으며, 이승만이 20,234표[83%], 부통령 선거에서는 이범석 후보가 14,321표[58.9%]를 획득하였다.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치러진 제3대 국회 의원 선거에 1954년 5월 20일에는 휴전 협정에 따라 휴전선 이북 지역으로 편입된 7개 선거구에서는 선거 시행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210개 선거구 중 203개 선거구에서만 의원이 선출되었다. 당시 3대 국회 의원의 임기는 4년으로 1954년부터 1958년까지 활동하였다. 가평군에서는 자유당의 공천으로 출마한 오형근이 13,998표를 획득하여 무소속으로 3선 의원에 도전하던 7,958표의 홍익표 의원과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3,295표를 획득한 구동권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되었다.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국민이 자유당의 횡포를 견제하기 위해 대항하기 위한 정당으로 민주당을 창당하였다. 1956년 5월 15일에 제 3대 대통령 선거 및 제4대 부통령 선거가 실시되어 이승만 후보가 504만 6437표를 얻어 216만 3808표를 얻은 조봉암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되었으며, 8명의 후보가 경쟁한 부통령 선거에서는 민주당의 장면 후보가 당선되었다. 당시 가평군의 대통령 선거 결과를 보면 모두 16개의 투표구에서 총선거인 수 30,225명 중 28,206명이 참가함으로써 93.3%의 높은 투표율을 보였으며 조봉암 후보가 3,232표, 이승만 후보가 18,151표를 얻어 각각 득표율 15%대 85%로 이승만 후보가 압도적으로 많은 표를 받았으며, 또한 부통령 후보 선거 결과에서는 자유당의 이기붕 후보가 13,053표로써 전체 유효표 수의 49.6%를 얻음으로써 타 후보에 비해 압도적 우세를 보인 반면 부통령으로 당선된 민주당의 장면 후보는 9,524표를 획득하는데 그쳤다.
제4대 국회 의원 선거는 1958년 5월 2일에 치러졌으며 총 233석 중 자유당 126석, 민주당 79석, 무소속 27석, 통일당 1석의 의석 분포로 나타났다. 이번 선거는 자유당이나 민주당 양당의 공천이 없이는 당선이 어려웠을 정도로 정당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가평군에서도 역시 정당의 공천을 얻은 후보자들이 경쟁하였다. 민주당에서는 재선 의원을 지낸 홍익표를 공천하였고, 자유당에서는 중·고교 교장을 역힘한 김종관이 공천을 받았으며, 3대 총선에서 자유당으로 공천을 받았던 오형근 의원와 장봉순이 무소속으로 선거에 출마하면서 4파전으로 치러졌다. 총 유효 투표수 26,068표 중에서 민주당의 홍익표 후보가 12,484표[47.9%]를 얻어, 8,039표의 자유당 후보인 김종관과 3,373표인 오형근 후보, 2,172표인 장봉순 후보를 제치고 3선 의원에 당선되었다.
제5대 국회 의원 선거는 내각 책임제 권력 구조로의 개헌과 더불어 양원제 의회가 채택됨으로서 새로운 선거법에 의거하여 민의원 233명과 초대 참의원 58명에 대한 선거가 실시되었다. 당시 가평군에서는 민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의 홍익표 의원이 4선 의원에 도전하였고, 자유당에서는 4대 총선에 출마했던 김종관을 재공천하였으며, 무소속으로 육사를 졸업한 신만재가 출마하였다. 선거 결과 민주당의 홍익표 의원이 13,737표를 획득하여 5,680의 신만재 후보와 6,202표의 김종관 후보를 제치고 당선되어 4선에 올라섰다. 6대 국회 의원 선거는 한국 선거 사상 처음으로 선거구를 지역구와 전국구로 구분하여 지역구에는 소선거구 다수 대표제를, 전국구에는 비례 대표제를 적용하여 실시하면서 가평군 역시 인근 지역인 연천·포천과 선거구가 합쳐져 치러지게 되었다. 본격적인 정당 정치의 활성화가 시작되면서 국회 의원 선거에서도 민주당을 비롯한 자유당, 민주공화당 등 7개의 정당에서 후보를 배출하였으며 3공화국 시기에는 대한민국 보수주의 정당이자 여당 세력인 민주공화당에서 국회 의원이 선출되었다.
[제4공화국]
1972년 위헌적 계엄과 국회 해산 및 헌법 정지 등을 골자로하는 대통령 특별 선언인 유신 체제가 진행되면서 대통령 선출 방식이 국민의 직접 선거에서 간선제로 바뀌면서 대통령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어 국회의 역할은 매우 한정적이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국민들의 저항은 계속되었고 이러한 저항의 결과는 제10대 총선에서 야당인 신민당이 여당인 민주공화당을 득표율에서 앞서는 결과로 나타났다. 왜냐하면 여당의 득표율이 야당의 득표율보다 떨어진 것은 헌정이래 최초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가평군에서는 연천군, 포천군, 양평군과 함께 제8선거구로 분류되었고 2명의 국회 의원이 선출되었는데 민주공화당과 제1야당인 신민당에서 1명씩 선출되었다.
[제5공화국]
제4공화국의 불안한 정세는 지속적으로 이어지면서 제5공화국 역시 신군부에 의해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가 묵살되었다. 형식적으로는 민주주의를 지향하면서 국회의 권력을 강화하였지만 사실상 야당 인사의 대선 출마가 금지되고 야당 참여자를 미리 선별했을 뿐 아니라 일부 운영비를 보조하고 전국구 후보들의 당비 헌금 한도액까지 관리하였다. 이 시기 가평군에서는 여당과 관제 야당 후보를 비롯하여 무소속 후보들이 출마하였으나 여당인 민주정의당과 관제 야당인 민주한국당과 한국국민당에서 국회 의원이 선출되어 국가 정세가 반영된 결과가 나타났다.
[제6공화국]
제5공화국의 말기에 들어와 정치 쟁점화한 민주화 요구와 사회 혼란의 갈등이 심화 되면서 12대 국회 의원 선거를 통해 출범한 신한민주당이 제1야당으로 성장하게 되고 이로 인해 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더욱 거세지게 되었다. 국민의 민주화 열망으로 1987년 6월 항쟁의 결과로 5년 단임의 대통령 직선제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헌법 개정안이 국민 투표에 의해서 확정되면서 국회 의원 선거법 역시 92개 지역 선거구를 224개로 늘리고 1구에서 2인씩 선출하던 것을 1구에서 1인씩 선출하도록 하며, 전국구 의원수를 지역구 의원 정수의 2분의 1에서 3분의 1로 감축하는 것으로 개정되었다.
13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는 지역별로 선호하는 당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무소속 출마자 역시 증가하였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가평군도 선거구의 변화가 나타나면서 연천·포천 선거구가 분리되고 가평·양평 선거구로 재조정되었다. 13대·14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는 여당인 민주정의당과 민주자유당을 비롯하여 통일민주당, 신한민주당, 신민주공화당, 신정당, 국민당을 비롯하여 무소속으로도 여러 후보들이 출마하였으나 여당인 민주정의당과 민주자유당에서 의원들이 선출되었다.
14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3당 합당과 야권 통합이 이루어진 상태에서 치뤄져 선거 결과에 매우 큰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이 시기에는 지역 정서가 강하게 작용하였다. 가평에서도 역시 민자당 김영삼 후보가 가장 큰 득표를 하였으며, 국민당 정주영, 민주당 김대중 후보가 뒤를 이었다. 이 후 지역 자치제가 도입되면서 진행되는 대선과 총선, 지방 선거의 결과를 살펴보면, 가평에서는 주로 보수 정당이 우세하게 역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5대 대통령 선거에는 지역 정서의 심화와 더불어 표의 동서 현상이 나타났다. 이러한 영향으로 경기에서는 새정치국민회의가 지지를 받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러나 이인제 후보가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새로운 당을 창당하면서 가평에서는 새정치국민회의가 아닌 국민신당의 이인제 후보가 큰 득표를 받았으며, 한나라당이 그 뒤를 이었다. 이것은 새정치국민회의를 지지한 경기도 분위기와는 다른 양상을 나타냈다.
가평군의 정치적 성향은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정당을 선호하는 결과를 보이고 있다. 16대 국회 의원 선거를 살펴보면 가평군과 양평군에서는 한나라당 후보가 45.6%의 득표율로 당선되었으며 , 16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한나라당의 이회창 대표가 49.2%로 민주당의 노무현 대표보다 많은 표를 획득하였다. 17대 국회 의원 선거 결과에서도 한나라당 후보자가 지역구 득표로 59%를 차지하였고 정당 득표에서도 43.9%를 차지하여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을 물리치고 선출되었다. 이러한 가평군의 정치적 성향은 21대 국회 의원 선거까지 비슷한 상황으로 진행되었다.
[기초단체장 선거]
가평군수 선거 결과는 정당 정치의 결과와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가평군수 선거를 보면 1995년부터 실시된 7차례의 선거 중 6차례나 무소속이 당선되는 결과를 보였다. 무소속 당선은 민선1기부터 시작되었는데 그 이유는 정당 후보들은 정당 논리를 핑계로 지역 발전을 더디게 만든다는 불만에서 시작되었다. 39대까지 무소속이었던 현 군수가 40대 선거에서 자유한국당으로 입당하면서 자유한국당 소속의 후보가 당선되었다.
[가평군의회 의원 선거]
가평군의회는 1990년 12월 지방자치법 및 지방의회의원 선거법이 개정되면서 1991년 군의회 의원 7인이 선출되었다. 이후 1995년 제1회 지방 선거에서 의원 7인이 선출되었고, 매년 지방 선거에서 의원 7인이 선출되었고, 2018년 6월 13일 제7회 전국 동시 지방 선거에서 의원 7인이 선출되어 8대 가평군의회가 운영되고 있다. 가평 지역의 3개위 선거구에 6명의 국회 의원과 1명의 비례 대표로 구성되어 있다. 1대부터 4대 의원들은 선거구가 따로 지정되어 있지 않았다. 2006년 5대 의원들이 선출되면서 3선거구 6명의 의원과 비례 대표 1명으로 구성되어 2019년 8대 군의회가 운영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