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900691
한자 閔泳純
영어공식명칭 Min Yeongsun
이칭/별칭 영준,덕윤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기도 가평군 북면 화악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조범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79년 1월 27일연표보기 - 민영순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8년 - 민영순 『독립신문』 편집원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1일 - 민영순 3·1운동 참여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19년 3월 15일 - 북면 만세시위 전개
활동 시기/일시 1919년 9월 2일 - 민영순 개벽사(開闢社) 창립발기인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20년~1926년 - 민영순 잡지 『개벽(開闢)』 발행
몰년 시기/일시 1929년 3월 11일연표보기 - 민영순 사망
출생지 민영순 출생지 - 경기도 가평군 북면 화악리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남성
대표 경력 3·1운동 참여|『개벽』 인쇄인

[정의]

일제 강점기 경기도 가평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민영순(閔泳純)[1879~1929]의 본관은 여흥(驪興), 초명은 영준(泳俊), 자는 덕윤(德允)이다. 아버지는 고종 때 황해도병마절도사를 지낸 민성호(閔成鎬)이며, 1879년 1월 27일 가평군 북면 화악리에서 태어났다.

1905년 가평군 북면 소법리의 정응길(鄭應吉) 딸과 혼인하였다.

[활동 사항]

민영순은 1891년 이규봉(李圭鳳)의 문하에 들어가 시서(詩書)를 공부하였고, 1895년 천도교에 입교하였다. 1897년 가평보통학교에 입학하여 4년 동안 수학하였다.

1912년 서울로 상경하여 천도교 본부에서 일하기 시작하였고, 천도교 3대 교주인 손병희(孫秉熙)의 신임을 얻어 1914년 종무원 서기를 맡게 되었다. 1918년 이광수(李光洙), 정한교(鄭漢敎)와 함께 『독립신문』 편집원이 되었으며, 3·1운동을 앞두고 천도교 간사를 맡아 정한교와 함께 독립선언서의 제작 및 배포, 만세운동 준비를 하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의 태화관의 경비를 맡고 있었으며, 일본 경찰에 피체되었으나 곧 풀려났다. 경찰서에서 풀려난 민영순신숙(申肅)과 함께 정한교의 집에서 앞으로 사태에 대해서 논의하였다. 이때 그의 스승인 이규봉(李圭鳳)이 고종의 인산에 참석하려고 상경하였다가 정한교의 집에 들렸다. 이때 민영순신숙, 정한교와 함께 이규봉에게 3·1운동 소식을 전하였다.

이후 민영순은 언론활동에 주력하였다. 1919년 9월 2일 이돈화(李敦化), 김기전(金起田), 박달성(朴達成) 등과 함께 천도교에서 설립한 출판사인 개벽사(開闢社)의 창립발기인에 참여하였다. 개벽사는 1919년 12월 20일 잡지허가를 신청하고, 1920년 6월부터 잡지 『개벽(開闢)』을 발행하였다. 민영순은 인쇄인으로 참여하였다. 이어 잡지 『부인』, 『신여성』[1923], 『어린이』[1924], 『별건곤』[1926] 등 개벽사에서 발행한 잡지의 인쇄를 맡았다. 개벽사는 총독부의 검열과 즉결처분에 불복하고 정식재판을 청구하여 식민권력에 저항하였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정기발행을 지속하여 독자들의 신뢰를 얻고 민족적 잡지사로 인식되었다.

1926년 개벽사는 6·10만세운동을 준비하다가 발각되어 조선총독부의 노골적인 탄압을 당했다. 1926년 8월 『개벽』이 발행금지 처분을 받게 되었다. 개벽사의 인쇄인이었던 민영순 또한 요시찰인물이 되어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고, 1929년 3월 11일 고문으로 인해 사망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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