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3013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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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 - - - 黃山 - |
영어공식명칭 | Mellow Old Smell in Doldamgil, Hwangsan Village |
이칭/별칭 | 대정ㅣ노루목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신용균 |
[정의]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에 있는 거창 신씨 세거지인 조선 시대 반촌 한옥 마을.
[개설]
황산(黃山) 마을은 덕유산 남쪽 원학동에 자리 잡은 유서 깊은 마을이다. 그 품이 넓어 넉넉한 덕을 지녔다는 덕유산은 이르는 곳마다 비경을 만들어 냈거니와, 옛 사람들은 덕유산 자락이 남쪽으로 이어지면서 빚어 낸 아름다운 계곡을 “안의 삼동”이라고 불렀다. 안의현에 있는 세 골짜기라는 뜻이다. 산수가 좋은 곳에는 항상 멋들어진 정자가 있는 법, 안의 삼동에도 계곡마다 빼어난 정자들이 있었으니 화림동의 농월정, 심진동의 심원정, 원학동의 요수정이 이를 대표한다. 황산 마을은 요수정의 주인인 거창 신씨(居昌愼氏) 요수(樂水) 신권(愼權)의 후손들이 수백 년 동안 세거하고 있는 동성 마을이다.
[유교 전통이 살아 숨 쉬는 동성 마을]
황산 마을은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 호음산 남쪽에 자리 잡고 있다. 호음산은 “포효하는 호랑이가 개를 쫓는 형상”이라는 뜻으로 마을 앞에 있는 개밥말산은 호랑이에게 쫓기는 개의 모습이다. 마을 앞에는 비옥한 문전옥답이 꽤 넓게 펼쳐져 있고, 그 들판은 덕유산에서 발원한 거창 위천(渭川)까지 이어진다. 호음산을 등지고 서서 들판과 시냇물, 그리고 그 건너편 덕유산에서 내리뻗은 1,353m의 금원산, 기백산 능선을 바라보노라면 황산 마을이 명당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원래 황산 마을은 지형이 노루의 목처럼 생겨서 노루목으로 불렸다가 조선 시대에 황토 백산(黃土白山)의 이름을 따서 황산이라고 했다. 일제 강점기 때는 큰 정자나무가 많다고 해서 대정으로 불리다가 1995년부터 다시 원래 이름을 되찾았다. 황산 마을은 호음산에서 흘러내리는 호음천을 중심으로 두 구역으로 나뉘는데, 개울의 동쪽을 동촌, 서쪽을 큰땀이라고 부른다. 현재 두 마을은 각각 70여 세대, 12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어서 비슷한 규모이지만 조선 시대에는 동녘은 민촌, 큰땀은 반촌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그 외형적 차이는 분명하다. 이 글에서 다루는 전통 마을 황산은 큰땀[황산 1구]이다.
큰땀은 하늘에서 보면 거북 형상을 하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마을의 위에서는 부(富)가 나고 아래에서는 귀(貴)가 난다고 하는데, 마을이 시작된 아랫담에서 많은 대과 합격자를 냈던 반면, 윗담에서는 부자들이 많이 나왔기 때문에 생긴 말이다. 마을에 빼곡히 들어앉은 20여 호의 가옥, 110여 채의 건물은 모두 한옥 기와집이며, 대부분 안채와 사랑채를 갖춘 양반 집으로 조선 시대 부농층의 양반 마을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조선 시대 유교 전통이 고스란히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점이 마을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게다가 동성 마을의 특징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마을은 아직까지 거창 신씨 일가로만 구성되어 있다. 거창 신씨는 마을이 세워진 이래 지금까지 그 긴 세월 동안 타성 사람들에게는 집을 팔지 않았다고 한다. 여기에는 마을 사람들 사이에 암묵적인 동의와 압력이 있었겠지만, 동시에 그만큼 동족 의식이 강하고 지속적이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향촌 사회가 지닌 문중의 장기 지속성을 그대로 보여 준다고 하겠다. 하긴 동족 마을이 조선 후기 문중의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출현한 것이고 보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지만, 그 지속성이 일제 강점기, 해방과 전쟁을 거쳐 지금까지 이어졌다는 것을 생각하면 거창 신씨의 동족 의식은 특출하다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이토록 강렬한 동족 의식은 어디서 온 것일까?
[황산에 반촌의 마을을 세우다]
거창 신씨는 거창 유씨, 거창 장씨와 함께 거창의 3대 토성 중 하나이다. 거창 신씨의 시조는 고려 문종 때 송나라에서 귀화하여 고관대작을 지낸 신수이며, 신수의 아들 신안지, 그리고 몽골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던 신집평에 이르면서 이름난 가문으로 자리 잡았다[『고려사(高麗史)』 참조]. 신씨 가문이 거창에 세거한 때는 고려 말로 보인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 태조 때부터 신이충과 아들 신기, 신전이 잇달아 고관에 올랐으며, 성종 대 신승선 때에 명문거족이 되었다. 신승선은 세종의 손녀와 결혼하였고, 연산군의 장인이 되었으며, 벼슬이 우의정에 이르렀다. 신승선의 아들 신수근은 벼슬이 좌의정으로 연산군의 처남이자 중종의 장인이었다[『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참조]. 이 시기에 거창 신씨의 일족이 황산 마을에 터를 잡았다.
거창 신씨가 이곳에 입향한 것은 16세기 신기의 증손인 신우맹(愼友孟)이 초계 정씨 정옥행의 사위로 위천으로 이주한 데서 비롯되었다. 당시 신우맹의 집은 현재 수승대 정문 앞에 있었다. 신우맹의 아들 신권은 수승대에 서당을 짓고 학문을 연구하였다. 현재 위치에 황산 마을이 개척된 것은 신권의 5대손 신수이(愼守彛)[1688~1768, 호는 황고, 당호는 취한당]에 의해서였다. 신수이는 영조 대 노론계 학자로 위천에서 일어났던 정희량의 난 수습에 큰 역할을 했던 인물이었다. 정희량의 반란 이후 거창 지역이 “반역향”으로 떨어져 벼슬길이 막혔던 가운데서도 신씨 문중 인물들은 지속적으로 관직에 진출하였고,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부를 유지하였다. 문중에 대한 남다른 자부심은 당연하다 하겠다.
황산 마을의 개척은 18세기 신수이가 먼저 이곳에 집을 지은 후 신수이의 8촌 이내 친족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이주하면서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신수이가 처음 터를 잡았던 취한당 아래 10여 호의 작은 마을이 형성되었다가, 자손이 번성함에 따라 그 위쪽으로 계속 집들이 지어졌고, 마지막으로 윗담에 집들이 건축됨으로써 완성되었다. 따라서 황산 마을은 종가집이 가장 안쪽에 위치한 일반적인 전통 마을과는 달리 입향조의 종가집이 아랫담에 자리 잡고 있다. 우리가 마을 입구에서 걸어 올라간다면 마을이 만들어진 역사를 시기 순서대로 밟게 되는 것이다.
황산 마을의 고전적인 향취는 담장에서부터 묻어난다. 원래 담장이란 집과 집을 구분하는 가름막이지만 이 마을의 담장은 마을의 분위기를 그윽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다. 길과 집터의 경계를 따라 때로는 곧고 때로는 활처럼 굽어지는 담장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이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조선 시대 반촌의 흥취를 느끼기에 족하다. 무려 1.2㎞에 달하는 옛 담장은 1994년 등록 문화재 제259호로 지정되었다.
담장은 돌과 흙을 섞어 쌓은 토석 담인데, 자세히 보면 그 구조가 흥미롭다. 담의 아래 부분은 2~3척 정도의 제법 큰 네모꼴 돌로 쌓았고, 윗부분은 작은 돌과 흙을 섞어 쌓았다. 담장 위는 전통 기와로 이었다. 담의 아래 부분을 돌로만 쌓은 이유는 집 안의 물이 자연스럽게 빠져나가도록 하기 위해서였겠지만, 미적으로 보자면 돌담, 흙돌담, 기와지붕이 어우러져 멋진 정취를 자아내고 있다. 담장 길을 따라 걷다보면 어느덧 솟을대문이 나온다. 열려 있는 대문 안으로 조선 시대 한옥의 속살이 보인다.
[집집마다 자기의 향기를 지니고]
한옥들은 모두 자기만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실제 건물의 구조와 배치가 같은 집이 하나도 없다. 집의 구조는 마당에 따라 구분해 보는 것이 이해하기 좋을 것이다. 전형적인 양반집 한옥의 구조는 두 마당형이다. 두 마당형이란 주택 공간이 대문채-사랑 마당-사랑채-안마당-안채로 구성되는데, 남자와 여자의 생활 공간을 엄격히 구별하는 조선 시대 양반 가옥의 가장 일반적인 건축 구조이다. 황산 마을에 두 마당형 집이 가장 많은 것은 황산 마을에 거주한 사람들이 중상류 양반 계층이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반면 한 마당형은 마당을 중심으로 각 채들이 둘러싸고 있는 형식으로 거주인이 중농 정도의 경제력을 지녔다고 보면 될 것이다. 세 마당형은 사랑 마당, 안마당, 사당 마당의 구조이며, 사당을 갖는 종가집의 구성 양식이다. 황산 마을에 3호의 세 마당형 한옥이 있는 것은 마을이 3개의 소문중으로 구성되었음을 뜻한다. 두 마당형과 세 마당형이 전체 마을의 60%를 웃돈다는 것은 경남 지방에서도 몇 되지 않는 반촌으로서 황산 마을의 위상을 보여 주는 것이다.
건물 채의 구성도 가옥에 따라, 기능에 따라 매우 다양하다. 남부 지방에는 ‘一’ 자형 건물이 일반적이지만, 이 마을에는 ‘一’ 자형 이외에도 튼 ‘ㄱ’ 자형, ‘二’ 자형, ‘三’ 자형, 튼 ‘ㄷ’ 자형, 튼 ‘ㅁ’ 자형 건물이 고루 나타난다. 물론 복잡한 형식일수록 부잣집의 건축 양식이다. 이 중 ‘三’ 자형, ‘ㄷ’ 자형, ‘ㅁ’ 자형이 전체의 65%를 점하는 것으로 볼 때 역시 상류 계층, 부농층이 마을의 주류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건물의 칸 수는 안채, 사랑채, 부속채[아래채, 행랑채, 고방채, 사당, 대문채]의 기능과 가세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안채는 전면 3칸에서 5칸까지, 측면 1칸에서 2.5칸까지로 지어졌는데, 대부분 부엌-안방-마루-건넌방으로 구성된 4칸 집이다. 사랑채는 전면 3칸에서 5칸, 측면 1칸에서 2.5칸으로 건축되었는데, 그 크기와 구조를 제쳐 두더라도 전체 가호의 70%가 사랑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황산 마을이 가진 반촌으로서의 위상을 보여 준다고 하겠다.
이처럼 집집마다 건물의 배치와 구조가 다른 것은 집터의 지형과 넓이, 집 주인의 경제력, 지위 등과 관련되지만, 동시에 수백 년에 걸쳐 개축, 증축, 신축을 계속해 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마을은 18세기에는 작은 마을에 불과했지만 19세기에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가지게 되었고, 20세기에도 건축이 계속되었다. 예컨대 ‘원학동 고가’는 일제 강점기인 1927년에 개축된 건물이지만 그 예술성과 학문적 가치가 뛰어나 문화재로 지정되었다[경상남도 민속 문화재 제17호]. 물론 이러한 과정에서 처음에 초가였던 집들도 모두 기와집으로 개조되어 현재와 같은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
[명가의 본 모습, 황고 종택과 원학동 고가]
황고 종택과 원학동 고가는 아랫담과 윗담의 중심을 이루는 건축물이다. 황고 고택은 이 마을을 개창한 신수이의 집으로 사랑채, 안채, 사당이 담장으로 명확하게 구분된 전형적인 종가집이다. 취한당은 신수이가 1713년에 손수 지어 강학을 했던 이 고택의 사랑채이다. 신수이는 1726년 스스로 지은 ‘취한당 자서설(就閒堂自敍說)’에서 사랑채의 이름을 ‘취한당’으로 지은 연유를 밝히고 있다.
“벗하는 바는 책 속의 옛 사람이니 저절로 좋은 벗을 구하려고 애쓰는 일이 없고, 읽는 바는 옛 서적이라 어찌 따로 글을 써서 뽐낼 일이 있겠는가. 하늘을 우러러 보고 땅을 내려 보니 이 몸이 사는 곳이 넓고 커서 편안하고, 유유자적 한가로이 산수를 바라보면 기가 저절로 넓어지며, 한가로이 청풍명월을 즐기는데 시기하는 이 없고, 내 몸과 마음이 기쁜데 시비할 사람이 없도다.”
이어서 그는 사람들에게 한가함을 탐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오직 이익과 욕망에 골몰하여 평생토록 난잡하게 살면서 하늘과 세상에 죄는 짓는 것보다는 차라리 한가하여 그 해로움이 내 한 몸에 그치는 것이 더 낫다.”라며 어지러운 세상을 한탄하고 있다. 그는 출세보다 은거하여 학문을 닦는 것을 선택한 유학자였다.
이 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사랑채 앞에 있는 연못이다. 이 연못은 네모난 연못에 둥근 섬을 두는 한국의 전통 연못 양식[방지 원도형(方地圓島形)]과는 달리 둥근 연못에 네모난 섬을 두었다. 곧 “둥근 것은 하늘이요, 네모진 것은 땅”이라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유교적 세계관을 연못에서 구현했던 것이다. 그러나 근래 연못을 정비하면서 가운데 섬을 없애 버렸으니 애석한 일이다.
한편 원학동 고가는 1927년 신종삼이 기존의 집을 헐고 새로 지은 한옥이다. 신종삼은 일제 강점기 천석꾼의 대지주였으므로 신종삼이 지은 이 집은 전통에 실용성을 더했을 뿐만 아니라 정교함과 화려함 또한 극치를 이룬다. 이 집의 대문에는 아직도 ‘신도성’이라는 명패가 붙어 있다. 신도성은 신종삼의 아들로 도쿄 제국 대학을 졸업하고 연희 전문학교, 서울 대학교, 이화 여자 대학교 교수를 지냈으며 국회 의원, 경상남도 도지사, 국토 통일원 장관을 지냈던 인물이었다. 따라서 이 집안은 황산 마을뿐만 아니라 한국의 명가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원학동 고가는 그 자체로 훌륭한 답사거리이다. 솟을대문을 들어가면 사랑 마당 우측에 정면 6칸, 측면 3칸의 사랑채가 늠름하게 서 있고, 사랑채와 안채 사이를 구분하는 중문채는 독특하게 ‘ㅏ’ 자형 구조를 이루면서 헛간, 고방, 외양간, 1칸 방으로 구성되었다. 정면 5칸, 측면3칸의 ‘ㄱ’ 자형 안채는 중문채, 곳간채 등과 함께 ‘ㅁ’ 자를 이루어 안마당을 둘러싸고 있다. 집의 전체 구조를 보면 ‘日’ 자형이 된다. 이 고가는 집의 규모도 규모이거니와 주춧돌, 기둥, 누마루, 난간, 문살에서부터 처마와 지붕, 용마루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그냥 지나칠 것이 없다. 과연 전통 한옥의 근대적 계승이라 아니할 수 없다.
황산 마을은 한국을 대표하는 아름다운 마을이다. 담장 길도, 마을도, 한옥도 아름답고, 마을을 둘러싼 산수도 아름답다. 실제로 이 마을은 2015년 농수산부 소관 사단 법인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추진 본부’에서 선정한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로 선정되었다. 우리가 지금 이 고운 마을의 골목길과 한옥을 직접 둘러볼 수 있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마을의 모든 집은 대문을 열어 놓고 있으므로 담장이 고운 집, 사랑채가 운치 있는 집, 안마당이 예쁜 집을 둘러볼 수 있다. 또한 마을의 18개 고택에서 민박을 할 수 있고, 마을 가운데 있는 고가에서 전통 음식을 맛볼 수도 있다. 덤으로 안땀에서 다리를 건너 동녘으로 가면 담장에 그려진 벽화가 옛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누구나 살다보면 잠시나마 한가로움이 간절할 때가 있을 것이니, 그때 황산 마을은 우리 마음의 여유 공간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