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3013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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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背山臨水 最高- 休息處 武陵 -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남도 거창군 남하면 무릉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조익현 |
[정의]
경상남도 거창군 남하면 무릉리 이야기.
[개설]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의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영천(瀯川)과 월천 쪽에서 흐르는 아월천(阿月川)이 만나 시작되는 황강(黃江)은 남하 다리를 지나 합천댐으로 도도히 흐르고 있는데, 이 강의 동북쪽에 자리 잡은 마을이 동래 정씨가 500여 년 동안 터 잡고 살아온 경상남도 거창군 남하면 무릉리이다. 마을 뒷산에 옛 무덤이 많다 하여 ‘무덤실’, ‘무등곡’이라고 불리기도 하고, 마을 안에 무릉도원(武陵桃源)이 있었다 하여 무릉리(武陵里)라 부른다. 1914년 고모현면(古毛峴面)과 지차리면(只次理面)을 합하여 남하면(南下面)을 만들 때 면사무소를 이곳에 두었다. 마을 북쪽을 ‘넘마’ 또는 ‘상촌(上村)’, 남쪽을 ‘골담’ 또는 ‘곡촌(谷村)’이라 부르는 이 마을은 가야 때 김해 허씨가 처음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알려져 있다. 무릉 마을은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지형과 경상남도 거창군에서 가장 넓은 들판인 월평들을 기반으로 어느 마을보다 풍족한 삶을 누렸다. 산 자들의 축복인 이 마을은 죽은 자에게도 좋은 휴식처였다.
[선사인들의 별천지]
1983년 12월에 착공하여 1988년 12월에 완공할 예정이었던 합천댐 건설이 시작되자, 수몰이 예상되는 지역에 대한 유적 조사가 전면적으로 실시되었다. 경상남도 거창군 남하면 무릉리와 이웃한 경상남도 거창군 남하면 대야리에서는 신석기 시대 사람들이 살았던 마을이 발견되었고, 경상남도 거창군 남하면 무릉리 산포 마을에서는 면적이 204.7㎡에 이르는 청동기 시대 주거지와 수많은 고인돌이 발견되었다. 유적지들은 황강을 따라 선사인들이 생활하기에 편리한 모래흙 지대에 널리 분포되어 있었다.
경상남도 거창군 남하면 무릉리는 마을 앞으로 흐르는 황강이 강 옆으로 침식 작용을 일으켜 충적지가 넓게 발달해 있어 경작에 유리한 곳이다. 또 뒤로는 해발 627m의 일산봉(日傘峰) 줄기가 마을을 감싸고 있어 선사인들에게 최적의 입지 조건을 갖춘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마을이었다. 선사인들은 황강에서 고기를 잡고, 토질이 비옥한 들판에서 농사를 지으며, 산에서는 도토리를 주워 풍족한 생활을 하였다.
특히 경상남도 거창군 남하면 무릉리에서 발굴되어 거창 박물관 마당으로 옮겨진 고인돌에는 성혈(性穴)이 34개나 새겨져 있어, 청동기 시대 이곳 사람들의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의식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무덤이 많아 무덤실로 불리는 무릉리]
경상남도 거창군에는 30개소가 넘는 가야 고분이 분포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경상남도 거창군 남하면 무릉리 뒷산과 안산, 성영 근처, 양곡에서 월곡에 이르는 산언저리에는 수없이 많은 크고 작은 가야 고분이 흩어져 있다. 고분은 입지와 규모 등으로 보아 5~6세기 가야 고분군이다. 그러나 그 중요성이 학계나 일반인들에게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으며, 경작·묘지 조성·도굴 등으로 극심한 훼손이 이루어지고 있다.
2012년 12월부터 2013년 2월까지 경상 문화재 연구원에서 발굴 조사한 2기의 가야 고분은 이미 도굴이 되었지만 수혈식 석곽묘에서 수많은 대가야계 토기와 철제 갑옷, 철 화살촉, 꺾쇠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발굴 조사단이 유물을 분석한 결과 이 고분들은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에 걸쳐 조성된 것으로 판단되며, 무덤의 주인공은 거창 지역을 다스리던 거열 가야 지배자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대가야와 백제를 연결하는 육로를 관할하면서 교류하는 역할을 담당한 인물로 보인다.
발굴된 무덤 위로 올라서면 황강 일대와 월평들, 그리고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정장리 일대의 침식 분지와 거창 읍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6세기 대가야 출신의 악사 우륵이 가실왕의 지시를 받아 만든 가야금 12곡의 이름이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데 거기에 ‘거열(居烈)’이 나온다. 굳이 거열산성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이 지명이 거창을 가리킨다는 것쯤은 거창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가야금 12곡은 5~6세기 대가야를 중심으로 모인 가야 연맹 소속 국가들의 국풍(國風)[가야 각 나라들의 대표적인 노래]을 우륵이 가야금 곡조로 재정리한 것이다. 이 가야 고분은 거열 가야 당시의 모습을 짐작하게 하는 소중한 유적이다. 아쉽게도 대가야가 신라에 복속되는 562년(진흥왕 23)에 거열 가야도 신라의 지방 단위로 편제되었다.
[5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동래 정씨 집성촌]
조선 초기 이징옥의 난과 이시애의 난의 평정에 큰 공을 세워 동평군(東平君)에 봉해지고 그 뒤 경주부윤을 지낸 정종(鄭種)이 경상북도 고령군 덕곡면 윤동에 정착해 살았는데 그의 넷째 아들 사직공 정지운(鄭智耘)이 조선 성종 때(1470년경) 경상남도 거창군 남하면 무릉리에 처음으로 터를 잡았다. 사직공의 다섯 아들 중 삼 형제의 후손들이 경상남도 거창군 남하면 대야리와 경상남도 거창군 무릉리 그리고 경상남도 거창군 남상면 대산리에 살고 있다.
무릉리 동래 정씨 가문을 빛낸 인물로 동평군의 증손자 정표(鄭彪)가 있다. 정표는 1576년(선조 9)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 좌랑을 지냈었고, 옥과 현감 재직 당시에 선정을 베풀어 그곳 주민들이 그의 공덕을 칭송하는 ‘만세 불망비’를 세우기도 하였다. 지금도 무릉 마을에서는 정표가 태어난 집터 부근을 ‘옥과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정응두(鄭應斗)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거느리고 창원진 전투에 참가하였다가 순절하였는데 나라에서는 정응두의 공덕을 기려 통정대부 장예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정3품 당상관]을 증직하였다. 정응두의 유허비가 무릉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인 송정(松亭) 아래에 서 있다.
정시수(鄭時修)는 동계 정온으로부터 학문을 배워 인조 때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공부하였다. 병자호란 때 인조가 삼전도에서 수모를 당하고 강화를 하자 나라의 운명을 한탄하며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은둔으로 한 평생을 보냈다.
『조선의 성(朝鮮の姓)』(조선 총독부, 1934)은 경상남도 거창군 무릉리를 동래 정씨 85가구가 살고 있는 집성촌으로 소개하고 있는다. 이는 거창에서 다섯 번째로 큰 집성촌이다.
[무등곡의 동계와 향약]
정형진(鄭滎振)은 벼슬에 뜻이 없어 평생 동안 후진 양성에 힘썼으며 『심학전결』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정형진의 문집인 『평암집(平巖集)』 5권이 전하는데 여기에는 「무등곡(無等谷) 동계(洞契)와 향약(鄕約)」이 실려 있어 서로 돕고 살아가는 무릉 마을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 주고 있다. 여기에는 1628년(인조 6)의 「동계 구안(洞契舊案)」과 1710년(숙종 36)의 「동계 중안(洞契中案)」과 1755년(영조 31)의 「향약절목(鄕約節目)」, 1795년(정조 19)에 작성된 「범례(凡例)」가 전해진다.
이 자료에 따르면 무등곡에는 김해 허씨들이 처음 이주해 왔고, 지금의 동래 정(鄭)씨, 문화 유(柳)씨, 거창 신(愼)씨들은 모두 허씨의 외손들이라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믿음으로 서로 맺고 도우고 복종하며, 사람됨을 어기지 않은 것이 마음을 지켜가는 바다’라고 하면서, ‘마을 거소(居所)에 주산(主山)이 있으니, 마치 나라의 진산(鎭山)과 같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가 사람 몸의 모발과 다름이 없으니, 번성하고 우거져야 하니 잘라버림이 옳지 않도다.’라면서 마을 뒷산의 벌목을 엄격히 금지하는 조항도 있다.
특이한 내용은 매년 9월 9일 저녁이 되면 마을 뒷산에 있는 성령(城嶺)에 올라 마을의 노인과 젊은이들이 함께 술을 마시며 노래하고 시를 짓는 행사를 결의하는 내용도 있다. 이 전통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무릉 마을 출신 유중룡(柳仲龍)이 방계 친척인 정표(鄭彪), 서산 정씨 정복진(鄭復振) 등과 함께 연회를 베풀었던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무등곡의 동계와 향약은 조선 시대 무릉 마을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다. 아쉽게도 이 문서를 도난당했는데, 다행히 무릉 마을 출신 정무상이 1989년 7월 책자를 펴내어 그 내용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남겨진 유산]
무릉 마을의 영빈 서원(瀯濱書院)[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305호]은 1744년(영조 20)에 설립한 것으로 동래 정씨 정구(鄭矩), 정종, 정표, 정응두, 정시수, 정형진 등 6위를 모시고 있다. 1864년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일제 강점기에 국난 극복을 도모하고자 1919년 중건하여 민족 정신을 집결하는 공간으로 활용하였다. 영빈 서원은 그 뒤에도 ‘무릉 정씨’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면서 지역 교화에도 큰 역할을 한 곳이다. 음력 3월 3일과 10월 10일에 후손들이 모여 제를 올리면서 조상들의 높은 덕을 기리고 있다.
1686년(숙종 12)에 정응두의 현손인 산수정(山水亭) 정형초(鄭滎初)가 지은 목조 기와집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경상남도 유형 문화재 제287호로 지정되었는데, 조선 시대 사대부 집안의 전통적인 한옥으로 사랑채는 정형초의 호를 따서 산수정이라 부른다.
조선 인조, 효종 때 남인 유생들이 계를 조직하였던 낙영재(樂英齋)는 1925년 거창군 관아의 동헌에서 무릉 마을로 옮겨 왔다고 한다. 매년 4월 초정일에 퇴계 이황, 용주 조경, 미수 허목을 기리어 제사를 지내고 있다.
무릉 마을에는 마을의 역사를 증언하는 보호수 두 그루가 있다. 하나는 황강 강가에 서있는 수령 500여 년의 팽나무다. 한여름 들일에 지친 무릉 마을 주민들의 소중한 쉼터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고마운 나무다. 또 하나는 마을 뒤쪽에 조선 성종 때 정지운(鄭智耘)이 심었다고 전해지는 수령 700여 년의 느티나무다. 높이 23m, 둘레 6.6m가 넘는 큰 나무로 1982년부터 경상남도 도나무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고, 여름이면 들일에 지친 동네 사람들의 좋은 휴식처로 사랑을 받고 있다.
무릉 마을 남쪽 300m 지점에 안산과 논들, 황강 강변 쪽에 오래된 소나무와 함께 세 개의 조산(造山)이 나란히 서 있다. 풍수설에서 말하는 지기(地氣)의 허허로움을 막는 무릉 마을 사람들의 지혜다.
[전통을 이어가는 무릉 한과]
경상남도 거창군 남하면 무릉리는 황강을 따라 펼쳐지는 비옥한 토지에서 논농사를 주업으로 하고 있다. 1968년 유남 제사 공장이 들어서 마을 사람들이 부업으로 일을 하였으나, 지금은 그 자리에 주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레미콘 공장이 들어서 먼지만 날리고 있다. 무릉 마을 전체 가구 수 130여 호 중 대부분이 동래 정씨인지라 영빈 서원 담장 공사 때는 마을 사람들이 자발적인 부역으로 공사를 마쳤고, 마을길 포장도 다른 마을에서 흉내 낼 수 없을 정도로 잘 되어 있다.
무릉 마을에는 고향 어머니의 손맛이 살아 있는 향토 특산품 ‘무릉 한과’가 유명하다. 경상남도 거창군이 1994년부터 ‘농촌 여성 일감 갖기 사업’으로 시작한 무릉 한과는 이제 전국적으로 알려져 있다. 거창군 남상면 대산리 한산 마을 선산 김씨 집안에서 무릉 마을로 시집온 김원조가 부녀회의 기금 조성과 농촌 소득 증대에 관심을 갖고 동네 부녀회원들과 무릉 한과 작목반을 만들었다. 공동 작업장에서 큰 욕심 부리지 않고 정성과 손맛으로 만든 유과는 입소문이 퍼져 7~8월 비수기를 제외하곤 일손이 달린다고 한다.
2013년부터 경상남도 거창군에서는 무릉 마을과 황강을 경계로 마주보는 월평들에 거창 창포원 조성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거창 창포원 조성 사업은 합천댐 수몰 지구 내 미담수 농경지를 활용한 대단위 창포원 조성을 통해 친환경 생태 녹색 관광 자원으로 육성해 지역 주민의 소득 향상은 물론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2017년 완공을 목표로 추진되고 있는 사업이다. 이 계획에 의하면 강을 건너 무릉리 고분군으로 길을 내어 역사 문화 탐방로를 개설하려고 한다. 이 사업이 완성되어 노인들만 마을을 지키고 무릉 마을에 젊은 사람들이 찾아와 마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