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3013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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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西出 東流- 明堂 - 淸白吏- 産室- -, - -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동변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조익현 |
[정의]
서출 동류의 명당 터, 청백리의 산실인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못질 마을 이야기.
[개설]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동변리 못질 마을은 성주 이씨와 신창 표씨가 주를 이루고, 다른 성씨들이 함께 살아가는 마을이다. 못질 마을은 예부터 서출 동류의 명당터로 소문이 나 많은 성씨들이 터 잡고 살아온 마을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조선 시대 두 명의 청백리를 배출하고, 세 명의 절부와 열부 정려가 마을에 있다는 것에 큰 자긍심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하필 못질일까]
1986년 못질 마을 출신 이교형(李敎亨)이 집필한 마을지 『못질 마을』에 의하면 ‘모’는 풀의 어린 새싹을 뜻하는 순수한 우리말이고, ‘질’은 길(道)이 구개음화하여 질이 된 것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이 마을의 한자식 표기인 ‘모곡(茅谷)’은 이미 있었던 ‘못질’을 한자로 바꾼 것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따라서 모길이 모질로, 모질은 못질이 되고 이것이 비약해서 마을 이름으로 고정되었다고 한다.
[서출 동류의 명당]
‘못질’은 거창군 거창읍 동변리 일대의 자연 취락의 마을 이름이다. 조선 시대에는 거창부(居昌府) 모곡방(毛谷坊) 모곡리(毛谷里)에 속해 있었는데 옛날부터 못질이라고 널리 불렸다. ‘소나기 고개[驟雨嶺]’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는 아홉산[九山]에서 발원하는 물길은 모곡천(茅谷川)을 따라 서에서 동으로 흐르고 있다. 이곳에 터 잡은 못질 마을은 풍수설에서 말하는 명당자리로 잘 알려져 있다.
서출 동류수(西出東流水)는 음양이 화합하는 형세라고 한다. 해는 동쪽에서 뜨고 물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면 물과 빛이 부딪히게 된다. 물은 빛을 닿아야 따뜻함을 느끼고 불은 물을 만나야 찬 맛을 볼 수 있다 함이니 음양의 이치가 맞는 것이다. 예부터 서출 동류수가 흐르는 마을에는 걸출한 인물이 나고 마을이 부흥하는 길수(吉水)라고 알려져 있다. 그뿐만 아니라 서출 동류가 되면 북서쪽은 산으로 막아 주고 남동쪽이 트였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겨울철에는 북서풍을 막아 주어 따뜻한 남향(南向) 또는 동향(東向)의 입지 조건을 제공하여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곳이다.
이 때문에 못질 마을에는 일찍부터 수많은 성씨들이 들어와 살다가 떠나가곤 했다. 지금까지 기록으로 알 수 있는 성씨는 연안 이씨(延安李氏), 신창 표씨(新昌表氏), 밀양 변씨(密陽卞氏), 성주 이씨(星州李氏), 서산 류씨(瑞山柳氏)가 있다.
다만 모곡천이 마을 가까이 흐르고 있어 홍수가 났을 때 범람에 대비하여야 했다. 마을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마을 주위에 제방을 쌓고, 수양버들을 심어 빗물의 유입을 막아 하천 범람으로 인한 피해를 예방하려고 노력해 왔다. 마을 주민 표봉원[84세]의 증언에 의하면 여름에 큰 비가 오면 버드나무를 베어 둑 위를 덮어 범람 위기를 모면했다고 한다. 지금은 느티나무를 심어 수해를 예방하고, 또 여름에는 더위를 피하는 휴식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조선 후기 못질 마을에 살았던 이응백(李應伯)[1592~1672]은 못질 마을의 아름다운 경관을 읊은 「동고 사경(東皐四景)」이라는 7언 율시 4수를 남겼는데 제1경은 ‘아홉산 고사리 채취[九山採薇]’, 제2경은 ‘긴 숲에 쏟아지는 소나기[長林驟雨]’, 제3경은 ‘큰들 농사 이야기[大野農談]’, 제4경은 ‘뱀골 땔 나무 하기[蛇谷取薪]’로 묘사하고 있다.
[못질 마을 성주 이씨의 구심점, 이지활]
성주 이씨 시중공파(侍中公派) 고은(孤隱) 이지활(李智活)의 증손 이의안(李義安)이 1530년 가서(可西)[현재 거창군 가조면 동례리]에서 못질 마을로 옮겨와 살면서 이 마을은 성주 이씨의 집성촌이 되었다. 1934년에 조사된 조선 총독부 자료에는 45가구가 살고 있는 집성촌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2016년 현재에도 집성촌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거창의 성주 이씨 입향조(入鄕祖) 이지활은 이조 판서를 지낸 이비(李棐)의 아들로 1434년(세종 16) 성주 장지촌에서 태어났다. 14세 때인 1447년(세종 29)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1451년(문종 1) 18세 나이로 운봉 현감이 되어 덕으로써 백성을 다스리다가 1455년(단종 3) 임금이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로 유배당해 감을 듣고는 즉시 관직을 버리고 거창군 가조면 동례리 박유산(朴儒山)으로 들어가 은둔하였다. 이지활은 망월정(望月亭)을 짓고 매일 밤 북녘을 바라보며 통곡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망월정의 월(月)자는 단종이 계신 영월(寧越)의 월자와 음이 같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라 한다. 이곳에서 그가 남긴 시가 있으니 다음과 같다.
밤마다 그리운 마음, 이슥토록 깊어져[夜夜相思到夜深]
동에서 뜬 새벽달은 임과 나의 마음이라[東來殘月兩鄕心]
이때의 원통한 한을 풀어줄 사람 없어[此時寃恨無人解]
홀로 산정에 기대니 눈물을 막을 수 없네[孤倚山亭淚不禁]
1457년(세조 3) 10월 단종이 세상을 떠나자 현세에 마음을 잃고 매일 술로써 날을 보내다가 산속에서 죽었다. 1800년(정조 24) 유생 500여 명이 이지활의 충절을 조정에 상소하여 이조 판서의 증직과 문정(文靖)의 시호가 내려졌고, 정문(旌門)을 짓게 하였다.
이지활이 박유산 아래 처음 지었던 망월정을 뒷날 후손들이 선생을 기려서 가조면 동례리에 다시 세웠다. 그 후 홍수에 유실되어 터만 남았는데, 1813년 후손들이 못질 마을 뒷산에 거창 동변리 망월정[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536호]을 중건하였다. 1847년(철종 8)부터 거창 유림이 모여 음력 3월 초열흘에 석채례(釋菜禮)를 지낸다. 망월정 앞에는 ‘고은 이 선생 신도비(孤隱李先生神道碑)’와 옛날에 만든 ‘고은 이 선생 망북대비(孤隱李先生望北臺碑)’가 있고, 1999년 망월정 종중에서 세운 ‘헌성비(獻誠碑)’와 ‘고은 이 선생 시비(孤隱李先生詩碑)’가 서 있다.
[청백리로 칭송받은 표빈과 이후백]
못질 마을 주민들이 큰 자랑으로 여기는 것 중 하나가 조선 시대 217명의 청백리(淸白吏) 중 두 분이 이곳에서 배출되었다는 것이다. 모재(茅齋) 표빈(表贇)과 청연(靑蓮) 이후백(李後白)이 그 주인공들이다.
신창 표씨의 거창 입향조인 표위산(表偉山)의 손자 표빈은 1494년(성종 25) 표정명(表貞命)의 아들로 태어났다. 표빈의 재종숙(再從叔) 남계(藍溪) 표연말(表沿沫)에게 배웠다. 17세 때인 1510년(중종 5)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520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성균관 사성, 사헌부 장령, 전라도 도사, 울산 부사 등을 역임했는데 덕치와 청렴함이 벼슬아치들의 표본이 되었으며, 울산에는 선정비가 세워졌다.
관직에서 은퇴한 뒤 못질 마을에 집을 짓고 뜰에는 충절과 절개의 상징물로 비유되는 전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청백리에 선발되었고, 죽은 뒤 45년이 되는 1607년(선조 40)에 영의정으로 증직되었고, 『모재집(茅齋集)』이라는 문집을 남겼다.
마을 북서쪽에 있는 영사재(潁思齋)는 신창 표씨 영상공파의 종실로서 1671년(현종 12)에 후손들이 창건하여 지금까지 문중의 구심점이 되고 있는 곳이다. 종실 뒤 동산(東山)에는 1420년대에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상백리 백석에서 못질 마을로 이주해 온 표위산을 비롯하여, 표정명, 표빈 등 3대를 모시는 선산이 있다. 표위산은 아들 5형제를 두고 크게 번성하여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그 후손 중에는 제헌 국회 의원을 지내고 거창 중앙 고등학교를 설립한 표현태(表鉉台)[1903년~1982]가 있다. 표빈의 신도비는 후손들이 합천 이씨 효열각 앞에 1980년 11월 20일 세웠는데, 추연(秋淵) 권용현(權龍鉉)이 비문을 짓고 이헌주(李憲柱)가 글을 썼다.
표빈보다 26년 뒤에 태어난 이후백[1520~1578]은 연안인(延安人) 관찰사 이숙감(李淑瑊)의 증손이고 이국형(李國衡)의 아들이다. 이후백의 고조부 이말정(李末丁)[1395~1461]이 경상북도 김천시 구성면 지품에서 수해를 당하자 식솔을 거느리고 못질 마을로 이주해 왔다. 이말정은 정원에 매화를 심고 반석(磐石)에 앉아 다섯 아들과 학문과 도덕을 토론하였는데 그 바위를 오자암(五子岩)이라고 하여 지금도 마을에 남아 있다. 그 후손들은 7세 200여 년간 못질 마을에 살다가 다른 곳으로 이주해 갔다.
이후백은 어려서 어버이를 여의고 큰아버지 집이 있는 못질 마을에서 성장하였다고 한다. 거창읍 침류정(枕流亭)에서 표빈과 만나 같은 운으로 지은 시에 보면 ‘四十年前艸角流[사십 년 전에는 아직 소년배였더니]’라는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시구가 나온다.
이후백은 1535년(중종 30) 향시(鄕試)에 장원을 하고, 곧 상경하여 학문을 연마하였다. 1546년(명종 1) 사마시를 거쳐 1555년(명종 10) 식년 문과(式年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주서(承文院注書)로 첫 벼슬길에 올랐다. 그 뒤 이조 정랑을 거쳐,1574년 형조 판서가 되고 다음해 평안도 관찰사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문장이 뛰어나고 덕망이 높아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저서로 『청련집(靑蓮集)』이 있다.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기묘명현 변벽과 거창 부자 문위가 살았던 마을]
또 못질 마을을 빛낸 인물로는 귀산(龜山) 변벽(卞璧)을 들 수 있다. 밀양 변씨로 1483년 합천 초계에서 태어나 3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동래 정씨 외가가 있는 못질에서 성장하였다. 1519년(중중 14) 생원시에 합격하고, 현량과에 뽑혔으나 벼슬은 사양하였다. 평생을 못질 마을 구산(龜山) 아래에서 시가를 읊으며 은둔 생활을 즐겼다. 문위(文緯)는 변벽을 "가난하지만 학문을 즐기고 마음을 편히 했으며, 숨어 살면서 근심하지 않았다."라고 평했으며, 김육(金堉)은 『기묘명현록(己卯名賢錄)』에서 "학문이 깊고 효성스럽다."라고 소개했다.
현재 합천 이씨 효열각 뒤에 큰 바위가 거북 형상과 흡사한데 이를 두고 ‘귀암지축(龜巖之築)’이라고 한다. 이곳은 변벽이 살았던 집터라고 전해진다. 가조 병산의 병암 서원(屛巖書院)에 봉향되고 있으며, 후손들은 거창군 거창읍 갈마리와 가조면 사병리 병산 마을에 살고 있다.
‘거창 부자[孔夫子]’라는 칭호를 가진 모계(茅谿) 문위도 임진왜란이 끝난 이듬해인 1599년 46세 때 가북 용산에서 못질 마을로 옮겨와 살았다. 못질 마을에 모계 정사(茅谿精舍)를 열어 78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였다. 못질 마을은 조선 시대 거창 교육의 산실이고, 학문의 요람이었다.
[열부와 효부의 마을]
망월정 아래 부강려(扶綱閭)에는 못질 마을의 가슴 아픈 역사가 전해지는 곳이다. ‘절부 주부 이경일 처 동래 정씨지려(節婦主簿李景一妻東萊鄭氏之呂)’에 새겨져 있는 사연은 이렇다.
이지활의 6세손 이경일의 처 동래 정씨가 정유재란(1598) 때 왜적이 마을을 침범하여 부인의 목을 묶어 괴롭히자 욕을 당하느니 정절을 지키고 목숨을 끊으리라 생각하고 몸에 찾던 칼을 빼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동래 정씨의 슬픈 사연은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열녀도』 제6권에도 소개되고 있다.
“정씨는 거창 사람 선비 이경일의 아내로 훌륭한 덕이 있었다. 하루는 집에 불이 나자 정씨는 경황 중에도 불 속에 뛰어들어 신주를 안고 나왔다. 뒤에 정유재란 때, 왜적에게 잡혔는데, 왜적이 정씨의 목을 묶어 괴롭히니, 정씨는 몸을 빼내 성을 내며 꾸짖고, 차고 있던 작은 칼을 뽑아 스스로 목을 찔렀다. 왜적이 칼로 치고 쪼개도 손에서 칼을 놓지 않았다. 지금의 임금이 듣고 정려를 내렸다.”
부강려 옆에는 여장부(女丈夫) ‘열부 이진규 처 진양 유씨지려(烈婦李鎭圭妻晋陽柳氏之閭)’가 있다. 절부 동래 정씨 7세손 이진규는 1862년(철종 13) 임술 농민 봉기 때 장두(狀頭)로 지목되어 체포하려 하매 유씨 부인은 남편을 숨기고, 어린 자녀를 데리고 진주로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를 만나 대신 체포해 줄 것을 자청하였다.
병사가 부인의 의리에 감복하고 더 문초하지 않았다. 얼마 후 진주도 진압되고 남편이 자수하여 옥에 갇혔다. 부인이 또 다시 관청에 나가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 원정(血書原情)을 올려 마침내 죽음은 면했지만 황해도 풍천에 유배되는 형벌을 받았다.
유씨 부인은 관찰사를 만나기 위해 하루 낮과 밤을 걸어 300여 리[약 118㎞]의 경북 상주(尙州)에 도달하여 또 혈서 원정을 올렸다. 남편이 유배 형벌을 받은 후 매일 한밤중에 한 그릇의 정화수로 하늘에 재배하며 빌기를 한 번도 끊이지 않아 5년 뒤 마침내 유배에서 풀려나 집에 돌아왔다.
후에 부인이 병을 얻어 운명하려 할 때 딸이 손가락을 잘라 피를 입에 넣어 8일을 더 살게 했다고 한다. 사람들이 충신 절부의 가문에 열부와 효녀가 나왔다고 모두 칭송하였다. 고을의 유림이 여러 차례 천거하여 1892년(고종 29) 정려가 내려졌다. 1907년 기우만(奇宇萬)이 정려기를 찬하여, 부인이 살던 못질 마을 망월정 남쪽에 열부 정문을 세웠다.
마을 서쪽 길가에 있는 ‘열부 유학 표상욱 처 유인 합천 이씨지려(烈婦幼學表相旭妻孺人陜川李氏之閭)’의 사연도 못질 마을 사람들의 자긍심을 높이는 중요한 정신적 유산이다.
이씨 부인은 남편이 중병에 걸려 아무 약도 효험이 없자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닭고기와 같이 섞어 곰국으로 만들어 먹이니 병이 이윽고 낫게 되었다 한다. 이에 마을 사람들은 모두들 “지극한 정성이 하늘에 닿아 신이 축복을 내린 것이다.”라고 하였다. 1892년(고종 29) 나라에서 정려가 내려졌다.
동래 정씨, 진양 유씨, 합천 이씨의 눈물겨운 사연은 못질 마을의 성주 이씨 문중과 신창 표씨 문중의 자긍심을 심어 주고 있다.
[오늘의 못질 마을 풍경]
못질 마을 사람들은 대대로 마을 주위로 펼쳐진 비옥한 농토에서 논농사를 주로 지으며 풍요롭게 살아왔다. 요즘은 현재의 어느 농촌 마을이나 비슷하듯이 젊은 사람들은 대처로 나가고, 나이 많은 노인들만 마을을 지키고 있다. 그나마 젊은 사람들은 아월천(阿月川) 주변의 논에 비닐하우스 딸기 재배를 대규모로 하여 사계절을 모르고 열심히 일하고 있다.
마을의 뒷산인 아홉산 자락에는 거창의 특산물인 사과 재배를 많이 하고 있다. 그런 이유로 2014년 4월 마을 북쪽에 경남 사과 산업의 경쟁력을 높이고 지역 특화 산업 육성을 위한 경상남도 농업 기술원 소속의 ‘사과 이용 연구소’가 들어섰다. 요즘 못질 마을은 읍내 중심지와 가까워 전원 주택지로 각광을 받아 다른 농촌 마을과는 달리 빈집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