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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운동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00478
한자 靑年運動
영어음역 Cheongnyeon Undong
영어의미역 Youth Movement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재영

[정의]

일제 강점기 전라북도 고창 지역에서 전개된 청년 중심의 민족 운동.

[청년운동가 및 활동 내용]

1920년대 전반 고창 지역에는 고창청년회를 비롯한 성송청년회, 무장청년회, 성내청년회, 고수청년수양회 등 모두 7개의 청년 단체가 있었다. 이들 가운데 비교적 활발한 활동을 전개한 청년 단체는 고창청년회였으며, 핵심 인물인 홍종철(洪鍾轍), 김승옥(金升玉), 신기초(申基礎), 은규선(殷圭宣), 이휴열(李休烈), 양태승(梁泰承) 등은 모두 지방의 유력자들이었다.

홍종철은 당시 100정보의 땅을 가진 대지주였으며, 고창노동친목회 회장, 고창고등보통학교 이사와 집행위원회 부위원장, 『동아일보』 고창지국 고문을 역임하였다. 김승옥은 3·1만세 시위를 주동했으며, 고창청년회 총무, 노동친목회 총무와 평의원을 지냈는데, 사상범 예방 구금령이 공포된 이후 경찰서별 처단자 명단에 포함될 정도로 민족의 독립을 위해 꾸준히 활동한 항일 운동가였다.

신기초는 고창청년회 문예부장과 사교부장을 지낸 인물이었다. 은규선은 3·1만세 시위를 주도했으며, 고창청년회 부회장, 노동친목회 총무, 혈서결의동맹, 고창고등보통학교 서무부장, 문맹퇴치를 위한 조선농인사 이사, 모르핀방지회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이휴열은 3·1만세 시위를 주도했을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 자금 마련을 위해 흥동장학계를 조직하였으며, 성내청년회 임원, 고창고등보통학교 이사를 지내는 등 고창 지역 교육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양태승은 일본 고베신학교를 졸업한 인물로, 고창청년회 임원과 고창고등보통학교 교장을 지낸 바 있다.

이와 같이 3·1만세 시위를 주도했던 일부 인사들이 청년운동을 전개했으며, 청년운동은 노동 운동과 밀접한 유대 관계가 있었다. 특히, 모르핀 폐해를 예방하기 위한 모르핀방지회 임원들과 고창고등보통학교 간부, 그리고 언론계 인사들이 고창 지역 사회운동의 핵심 인물들이었다.

1920년대 중반부터는 사회주의자들이 민족 운동을 주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고창 지역에는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한 사회주의자들의 활동이 없었다. 1925년 2월에 개최된 전북청년대회는 당시 전국적으로 진행되고 있던 청년운동의 방향 전환과 관련이 있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으로 대회 자체가 금지되었다.

1920년대 후반 고창 지역 청년운동의 통일을 기하기 위한 고창청년동맹 창립대회가 1928년 5월 22일 개최되었다. 7월에는 고창청년동맹 고창지부와 무장지부가 조직되었다. 그러나 청년동맹의 활동을 처음부터 원천적으로 봉쇄하고자 한 일제의 탄압으로 원활한 활동을 전개할 수 없었다. 한편, 청년동맹에서도 각 면의 청년 단체를 흡수하지 못하고 일부 청년 단체만이 참가함으로써 이후 민족 협동 전선 운동인 신간회(新幹會)가 결성되지는 못하였다. 일제 강점기 사회운동은 청년운동에서 신간회에 이르기까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에도 고창 지역에서는 이같은 사회운동과 궤를 같이 하지 못한 것이다.

[활동 내용]

고창 지역 청년운동 단체들은 체력도 민족의 실력으로 생각하여 각종 체육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 강연회와 교육 활동을 전개했으나 청년회의 비중 있는 사업은 아니었다. 한때 일신야학(日新夜學)이 설립되어 무산 아동을 위한 교육이 실시되었으나, 이 역시 활발하게 전개된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1920년대 청년운동 초기 가장 활발한 활동이 강연과 토론, 강습소와 야학 설치였다. 청년회 임원 대부분이 지식인들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강연회 개최와 강습소 설치는 비교적 용이한 활동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창 지역과 관련된 기사가 일간지에서는 거의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지역 내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던 모르핀 중독 예방과 중독자 치료에 적극적이었다고 하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1923년 말 전라북도에는 모르핀 중독자 363명, 1924년 말 393명, 1925년 말 459명, 1926년 말 566명으로 매년 증가 추세에 있었다. 이것도 검거된 숫자에 불과할 뿐 검거되지 않은 자를 포함하면 그 수는 훨씬 늘어날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동아일보』에 보도된 고창 지역 모르핀 중독자 수를 신뢰한다면, 100명 전후의 중독자 수는 전라북도 내 가운데 대다수를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23년 전주교풍회, 고창청년회 및 줄포 유지들을 중심으로 모르핀 중독자 치료를 위한 진료소를 설치한 것으로 보아 고창 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 모르핀 중독자가 상대적으로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고창청년회에서는 기근으로 고통 받고 있는 동포를 위한 구제 사업과 재난 동포를 위한 구난 사업을 함께 전개하였다. 굶주리는 심원면 주민들을 구제하기 위해 신파극 공연을 계획하고 있었고, 동경 대지진 당시 피해를 입은 고창 출신 유학생 30여 명을 구제하기 위해 의연금 모금에 나서기도 하였다. 성내청년회에서는 1925년 6월 10일 기근 강연회를 개최하고, 조선기근구제회에서 보낸 동정금과 구호품을 분배하였다.

1925년 4월에는 당시 사회 문제가 되고 있던 흠치교 박멸을 결의하였다. 흠치교는 1922년 보천교(普天敎)로 경기도 경찰부에 등록하기 이전에 차경석(車京石)이 주도한 조직체였다. 당시는 시국대동단(時國大同團)이 결성되어 보천교가 사이비 종교라는 인식이 세간에 널리 퍼져 있을 때였다. 이밖에도 청년회, 소년회, 노동회 등 성격이 다른 청년단체 대표들이 모여 새로운 사회단체를 만들고자 하였다. 또, 이를 기반으로 새로운 사업을 진행하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지만 일제의 탄압과 집회 금지로 결국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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