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007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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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高汝興 |
영어음역 | Go Yeoheung |
이칭/별칭 | 빈거(賓擧),요은(鬧隱)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 송암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노석 |
성격 | 유학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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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 송암리 |
성별 | 남 |
생년 | 1617년 11월 8일 |
몰년 | 1678년 1월 23일 |
본관 | 제주 |
[정의]
조선 후기 고창 출신의 유학자.
[가계]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빈거(賓擧), 호는 요은(鬧隱). 주부를 지낸 고억령(高億齡)의 현손이다. 증조할아버지는 고응진(高應軫)이고, 할아버지는 병자호란 때 의병장이었던 여곡(麗谷) 고덕붕(高德鵬)이며, 아버지는 고수겸(高守謙)이다. 부인은 칠원윤씨(漆原尹氏)로 참봉을 지낸 윤사근(尹思勤)의 딸이다. 자녀로 고재정(高在貞) 등이 있다.
[활동사항]
고여흥(高汝興)은 9세 때인 1625년(인조 3) 내장사에 들어가 학승(學僧) 계묵(戒默)에게 글을 배웠다. 당시 하루에 겨우 두서너 줄을 배워 종일 단정히 앉아 글을 읽으므로 계묵이 크게 기특히 여기고 그의 등을 어루만지며 “이 아이는 뒷날 반드시 큰 선비가 되겠구나.” 하였다. 1628년(인조 6) 어머니가 죽자 어른같이 슬퍼하니 마을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며 칭찬하였다. 이후 외할머니의 슬하에서 마을 서당에서 『중용(中庸)』과 『대학(大學)』 등을 배웠다.
1636년(인조 14) 계묵이 죽자 여러 해 글을 배운 정리로 심상(心喪)[상복은 입지 아니하나 상제와 같은 마음으로 말과 행동을 삼가고 조심함] 3년을 하였고, 이후 50년 동안 제삿날이면 반드시 참석하여 공양을 올렸다. 아버지와 계모를 지성으로 섬겼으며, 1656년(효종 7) 외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심상 3년으로 양육의 은혜에 보답하였다. 또한 1659년(효종 10) 효종이 승하하자 심상 3년을 하며 술과 고기를 입에 대지 않았다. 1662년(현종 3) 아버지가 죽자 죽만 먹고 가례에 따라 장사를 지내고, 아침저녁으로 소리 내어 슬피 울면서 3년 동안 성묘를 계속했다.
1665년(현종 6) 노서(魯西) 윤선거(尹善擧)가 노성(魯城)[논산]에서 강학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책을 짊어지고 가서 『심경(心經)』과 『근사록(近思錄)』 등의 성리서를 읽으며 그 뜻을 속속들이 파고들어 깊게 연구하므로 윤선거가 감탄하며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겼다. 그는 동문인 명재(明齋) 윤증(尹拯)을 비롯하여 매당(梅堂) 서봉령(徐鳳翎), 서촌 백문옥(白文玉), 임사가, 권덕수, 김덕중, 최사중, 이수약 등과 교유하며 학덕을 높였다. 1669년(현종 10) 윤선거가 세상을 떠나자 삼띠[麻帶]를 두르고 기년복을 입었다. 그 뒤 서당을 열고 후학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내다 1678년(숙종 4) 정월 23일 향년 62세로 죽었다.
[학문과 사상]
고여홍은 비록 산림에 묻혀 세상에 쓰이지 않았으나, 안빈낙도하며 학문에 전념하여 「오경대지도(五經大旨圖)」·「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천인이기도(天人理氣圖)」·「대학지도(大學之圖)」·「중용지도(中庸之圖)」 등을 그림으로 체계화하고 그 깊은 내용을 설명하였으니, 그가 성리학에 얼마나 힘을 기울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의 문집에 남겨진 글은 모두가 경전 연구의 결과가 많고 시문이 얼마 되지 않는 점은 그의 학문이 성현의 가르침에 있고, 시문이나 짓는 것은 선비의 본업이 아님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리하여 그의 학문은 그의 후손과 향리의 많은 후진에게 끼친 바가 적지 않았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 『요은집(鬧隱集)』 4권 1책이 있다.
[묘소]
묘소는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의 빈월산 아래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