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310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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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高敞郡 獨立運動 -長書 紀念碑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석교리 7-1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백원철 |
건립 시기/일시 | 2014년 3월 - 고창군 독립운동 파리장서 기념비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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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소재지 | 고창군 독립운동 파리장서 기념비 -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석교리 7-1 |
성격 | 기념비 |
[정의]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석교리 새마을공원에 세워진 기념비.
[개설]
파리 장서 사건 혹은 유림 독립 선언이라 불리는 제1차 유림단 사건은 1919년 김창숙을 중심으로 한 유림의 인사들이 파리평화회의에 독립 탄원서[‘이하 파리 장서’]를 보내려고 했다가 발각된 사건이다. 3·1운동 유림의 인사들은 유림이 독립 선언에 참여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이를 대신하여 장문의 한국 독립 청원서인 파리 장서에 서명하였다. 서명인 137명 중 호남 출신 선비 10명이 파리 장서에 적극 참여하였는데 이 중 고석진(高石鎭), 고예진(高禮鎭), 고순진(高舜鎭), 고제만(高濟萬) 네 사람이 고창 출신이다. 이들의 행적을 기리기 위하여 2014년 3월 고창군 독립운동 파리장서 기념비를 세웠다.
고석진[1856~1924]은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의 제자로서 1906년 병오의병에 참여하였고, 독립의군부의 참모총장으로서 항일운동을 계속하였다. 광복 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고예진[1875~1952]은 최익현의 제자로서 1906년 무성서원에서 결성한 의병에 참여하였으며, 팔도에 보내는 포고문을 살포하다가 붙잡혀 전주감옥에 투옥되었다. 출옥 후 독립의군부 참모관으로서 항일 비밀결사 조직에서 활약하였다. 광복 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고순진[1863~1938]과 고제만[1860~1924] 역시 1906년 병오의병에 함께하였고, 1914년부터 유림의 비밀결사 조직인 독립의군부에서 활약하였다. 고순진은 건국훈장 애족장이, 고제만은 건국훈장 애국장이 각각 추서되었다.
[건립 경위]
파리 장서에 서명한 고창 출신의 고석진, 고예진, 고순진, 고제만의 행적을 기리기 위하여 2013년 11월 ‘한국유림독립운동 파리장서고창기념비건립추진위원회’가 구성되었으며, 민관 합동으로 고창군 독립운동 파리장서 기념비를 건립하기로 결의하였다. 이후 고창 군민들의 성금과 고창군의 보조, 국가보훈처의 보조를 합하여 건립 기금을 조성하고 2014년 3월 고창군 독립운동 파리장서 기념비 제막식을 거행하였다.
[위치]
고창군 독립운동 파리장서 기념비는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석교리 새마을공원에 세워져 있다.
[형태]
기단 위에 비신을 세운 돌로 된 기념비로 기단 높이는 약 1m, 비신 높이는 약 2m이다. 비신 3면에 한문으로 된 파리 장서 원문을 새기고, 기단에는 4면에 한글로 번역한 파리 장서 내용을 새겨 놓았다. 양 측면과 후방에 각각 와석을 세워 고창군 독립운동 파리장서 기념비를 추진하게 된 경위와 추진 위원 명단을 기록해 두었다.
[금석문]
비신 전면에 세로로 ‘한국유림 독립운동 파리장서비(韓國儒林 獨立運動 巴里長書碑)’라고 새겨져 있다.
[현황]
석교리 새마을공원에 세워진 고창군 독립운동 파리장서 기념비는 비교적 규모가 큰 기념비이다. 주위에 ‘근촌 백관수 선생상’과 ‘인촌 김성수 선생상’, ‘한상신 교사 추모탑’, ‘한말 의사 박도경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의의와 평가]
고창군 독립운동 파리장서 기념비를 통해 일제 강점기 초 잃어버린 국권을 되찾으려는 독립운동 과정에서 알려지지 않았거나 잊혀진 지역 유림의 독립운동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 새마을공원은 고창 군민이 휴식을 취하려고 즐겨 찾는 곳으로 고창군 독립운동 파리장서 기념비는 지역 주민이 가까이 접근할 수 있어 고창 군민에게 애국심을 고취시키며 아울러 자긍심을 느낄 수 있는 대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