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C0101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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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공음면 구암리 마래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경숙 |
[당산제를 2월 초하루에 지내게 된 사연]
공음면 구암리 마래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2월 초하루에 당산제를 지내고 있다. 2010년 3월 15일[음력으로 정월 그믐] 해가 질 무렵 마을회관을 찾았더니, 마을 주민들이 모두 모여 저녁식사를 하고 있었다. 오전부터 마을 이곳저곳과 당산제 지낼 장소인 할머니당산 주변을 청소한 후 할머니당산, 할아버지당산, 말바위당산, 큰샘당산에 인줄[새끼를 왼쪽으로 꼬아 백지를 끼운 것으로 ‘금줄’이라고도 함]을 쳤다고 한다. 불쑥 찾아갔는데도 어느새 밥부터 차려 준다. 식사를 하면서 어른들께 당산제의 유래를 여쭈어 보았다.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겄어! 몇 백 년은 되었겄제. 우리들 태어나기 전부터 모셨제. 돌아가신 어른들도 언제부터 모신지는 몰라. 윗대부터 모셔 왔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이어 받아 모시는 것이제.”
당산제를 지내는 많은 마을들이 그렇다. 윗대부터 모셔 왔기 때문에 모신다는 것이 유래라면 유래다. 전설 따라 삼천리 같은 그럴싸한 유래는 전하지 않지만 전통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 전해진다.
당산제를 지내는 날짜는 2월 초하루로 정해져 있다. 그러니까 정월 그믐날 밤 첫닭이 울면 메[제삿밥]를 짓기 시작해 2월 초하루 새벽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옛날에는 정월 대보름에 당산제를 지냈다는 이야기도 있다고 해서 날짜를 바꾼 이유를 여쭈었다.
“당산제를 지내기 전에 마을에 궂은일이 생기면 그 달에는 제를 모실 수가 없어. 2월 초하루로 옮겨서 지내야 허는디, 자꾸 그런 일이 생기니까 아예 2월 초하루로 날을 받은 거제. 초하루는 깨끗한 날이니까.”
그 뒤로 계속 2월 초하루에 모시다가 1970년대 두 해 동안 정월 대보름에 지낸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젊은 사람들한테 좋지 않은 일이 생기고, 마을 사람 꿈에 당산할머니가 자꾸 나타나서” 다시 2월 초하루에 모시게 되었고, 그 뒤로는 한 번도 날짜를 바꾸지 않았다고 한다.[]
마래마을 사람들이 모시는 당산은 모두 열두 당산이다. 그래서 마을 뒤편 할머니당산에서 당산제를 지낼 때 메 열두 그릇과 술 열두 잔을 올린다. 하지만 현재 마을에는 다섯 당산만 남아 있다. 낮에 청소를 하고 인줄을 친 할머니당산, 할아버지당산, 말바위당산, 큰샘당산 그리고 당산제를 지내고 날이 밝으면 짚으로 줄을 드려 줄다리기를 한 후 줄을 감는 줄당산[입석]이 그것이다.
줄을 드린 다음 그것을 어깨에 메고 마을을 한 바퀴 도는 ‘오방돌기’를 할 때에는 열두 당산을 모두 찾아다녔는데, 풍물을 치지 않게 되면서 오방돌기가 중단되었고 당산도 줄어들었다고 한다.
당산제를 지내는 할머니당산은 팽나무이다. 수령은 100년도 못 되었다는데 아주 굵고 크다. 어른 팔로 두 아름은 족히 될 듯하다. 원래는 이 팽나무 옆에 어른 팔로 한 아름이 넘는 소나무가 있었는데 고사했단다. 마을 주민들은 “그 소나무가 명물이었는디 50년쯤 전에 팽나무에 치여 죽어 버렸다.”면서 저마다 한 마디씩 아쉬운 마음을 내비친다.
마래주유소 뒤편 덕림산 자락과 마을이 만나는 곳에 있는 할아버지당산 역시 팽나무이다. 할머니당산보다 훨씬 작은 나무로, 시누대에 둘러싸여 작은 숲을 이루고 있다. 할아버지당산에서는 제를 지내지 않지만 인줄이 쳐져 있을 때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다. 1년에 한 번, 인줄이 쳐져 있는 동안에는 일상적인 공간에서 성스러운 공간으로 변하는 것이다. 그 밑으로 내려오면 말바위당산, 샘당산, 줄당산이 있고 그 주변으로 인줄이 둘러쳐져 있다.
[절차는 간소해졌지만 정성은 그대로]
옛날보다는 절차와 의례가 모두 간소화되었지만 지금도 마래마을 사람들은 정성을 다해 당산제를 지낸다. 낮에는 마을 사람들 모두가 나와 당산 주변을 깨끗하게 청소한 후 인줄을 치고 할머니당산에 옷을 입힌다. 당산옷은 무명천인 광목을 나무에 치마 두르듯 감아 놓으면 되는데, 할머니당산이 커지면서 “전에는 천을 3자 3치만 뜨면 됐는데 지금은 나무가 두꺼워져 그것으론 어림도 없다.”고 말한다.
옷을 입히고 난 후에는 당산나무 앞에 천막을 치고 난로를 옮겨 놓는다. 저녁식사를 마친 후 남자들은 모두 당산에 올라가 제사를 지낼 때까지 술과 음식을 나눠 먹으면서 기다려야 하는데 날씨가 춥기 때문에 천막과 난로가 필요한 것이다. 화주[제물을 장만하여 제사를 지내는 사람]를 뽑지 않은 후로 생긴 새로운 풍속이다. 전에는 화주 1~2명을 뽑아 그 사람만 당산에 가서 엄숙하게 지냈는데, 3년 전[2008년]부터 화주를 맡으려는 사람이 없어 마을 사람 전체가 공동으로 지내게 된 것이다.
화주가 있었을 때는 화주만 당산에 올라갈 수 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회관에서 제가 끝날 때까지 굿을 치면서 놀았다. 화주는 생기 복덕을 봐서 깨끗한 사람을 뽑았는데, 당산제를 지내고 난 후로도 1년 동안 궂은 데 가지 않아야 하고 궂은 음식을 먹지 않아야 하는 금기를 지켜야 했다.
제물은 비교적 간단하다. 삼실과[대추, 사과, 곶감], 북어, 김, 메, 술이 전부다. 그 흔한 나물도 올리지 않고 머리고기나 시루떡도 올리지 않는다. 그러나 열두 당산 음식을 모두 차려야 하기 때문에 양이 만만치 않다. 제주[술]는 주로 막걸리를 올린다. 전에는 ‘조례술’이라고 하여 깨끗한 집에 맡겨 탁주를 빚어서 썼다. 올해는 고창읍이나 가까운 곳에 나가서 살고 있는 마을 청년들의 계모임인 ‘큰샘’ 회원이 청주를 받아 와 그것을 제주로 썼다.
제물은 정월 그믐날 가까운 장에 나가서 사는데, 올해는 고창장에서 사왔다. 장에서 사온 제물은 회관에 두었다가 저녁밥을 먹은 후 할머니당산 앞으로 가져다 놓는다.
제의 절차도 간단하다. 마을회관에서 저녁을 먹고 8시쯤 당산에 올라가 불을 피우고 놀다가 밤 12시쯤 되면 쌀을 씻어 메를 짓는다. 작년까지는 나무로 불을 때 메를 지었으나 올해부터는 전기밥솥을 구입하여 메를 지었다. 또한 옛날에는 큰샘에서 물을 떠다가 메를 지었으나 지금은 당산 옆에 있는 살림집 수돗가에서 쌀을 씻고 메를 지었다.
전기밥솥에서 김이 피어오르자 마을 사람들이 제사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전깃불이 있는데도 당산 앞에 두 개의 촛불을 밝히고 제석 위에 삼실과와 북어를 먼저 놓았다. 그 다음에 메 열두 그릇을 놓고 수저와 젓가락을 놓은 다음 술 열두 잔을 올렸다. 제사상이 다 차려지자 참석한 사람들이 나란히 서서 절을 두 자리씩 했다. 절을 하고 나서는 가장 연장자인 최대근[1927년생] 씨가 8명이나 참석한 ‘큰샘’ 회원들의 건강과 재복을 비는 축원을 했다. 그렇게 제의가 끝나자 술을 돌리며 음복을 했다. 건배까지 하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당산제 모시기 위해 걷는 불알값]
전통 사회에서는 마을의 평안과 농사의 풍작을 기원하기 위해 대부분의 마을에서 당산제를 모셨으나 일제강점기와 6ㆍ25전쟁, 새마을 운동을 거치면서 대부분의 마을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추위에 떨어야 하고, 이것저것 귀찮은 일도 많고, 비용도 만만치 않게 들어가지만 여전히 당산제를 지내고 있는 마래마을 사람들. 가치관이 바뀌고 생활 방식이 바뀌면서 당산신에 대한 믿음이 약해지긴 했지만, 지금도 마을 어른들은 당산의 영험함을 믿고 있다. 그 근거로 그들은 30여 년 전의 이야기를 꺼낸다.
“한 30년 됐을 것이여. 마을에 저울장수가 와서 살았는디, 당산 소나무 밑에서 갈퀴나무를 해서 불을 땐 거야. 마을 사람들은 아무도 당산에 손을 안 댔는디, 객지에서 와서 모르고 그런 것이제. 그래 갖고 병원에 가서 큰 고생을 했제. 우리 마을 사람들은 아무리 나무가 귀해도 당산에는 손도 안 댔어.”
마래마을 사람들은 6ㆍ25전쟁 중에도 당산제를 지냈다고 한다. 피난을 갔다가도 당산제 모실 때가 되면 마을로 돌아와서 제를 모신 것이다.
당산제를 지내기 위해 들어가는 돈은 모두 걷어서 마련한다. 지금은 집집마다 한 사람이 살면 1만 원, 두 사람이 살면 1만 5000원을 걷지만, 전에는 ‘불알값’이라고 하는 돈을 걷어 제사 비용으로 썼다. 불알값은 집안에 있는 남자들 수에 따라 정해진 금액을 내는 것으로 ‘명화전’이라고도 했다. 여기에 외지에 나가 있는 출향객과 고창 관내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의 찬조금이 보태지고, 혹시나 부족하게 되면 마을 공동 자금으로 적립되고 있는 ‘천중돈’이 보태졌다. 2010년에는 당산제 제물과 마을 사람들이 나눠 먹을 음식 등 40여 만 원의 비용이 들었다.
당산제가 끝난 후 ‘큰샘’ 회원들과 술잔을 나누는 최대근 씨에게 물었다. 어르신 돌아가시고 난 뒤에도 당산제가 계속 이어지겠느냐고. 최대근 씨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더니 청년들을 보면서 무겁게 입을 떼셨다. 앞니가 하나도 없어 바람소리가 많이 섞였지만, 가슴 속 깊이 새겨지는 말이었다.
“우리도 옛날 어른들부터 지켜 온 것이라 지켜 왔는디. 우리가 죽고 없더라도 없어지지는 않겄지. 마을 전통을 없애지는 않겄지. 하나라도 누가 나서서 해 주겠지. 지들도 알겄지. 그러기를 바라는 것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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