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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900827
한자 李仁任
영어음역 Yi Inim
이칭/별칭 자중(子重),승암(勝巖),황무(荒繆)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고령군 성산면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위은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출신지 경상북도 고령군 성산면
성별
몰년 1388년연표보기
본관 성주
대표관직 좌시중

[정의]

고려 후기 고령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자중(子重), 호는 승암(勝巖). 할아버지는 성산군 이조년(李兆年)이고, 아버지는 성산후 이포(李褒)이다.

[활동사항]

이인임(李仁任)[?~1388]은 지금의 고령군 성산면에서 태어났다. 음보(蔭補)로 전객시승(典客寺丞)이 된 후 전법총랑(典法摠郞)을 거쳐 1358년(공민왕 7) 좌부승선(佐副承宣)이 되었다. 1359년(공민왕 8) 홍건적이 침입하여 의주를 함락시키자 서경존무사(西京存撫使)에 임명되어 홍건적을 격퇴하였고, 1361년(공민왕 10) 2차 침입 때는 개경을 탈환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이듬해 개성부판사(開城府判事)에서 서북면도지휘사(西北面都指揮使)를 거쳐 첨의평리(僉議評理)가 되었고, 1364년(공민왕 13) 서북면순문사 겸 평양윤(西北面巡問使兼平壤尹)이 되어 최유(崔濡) 등이 덕흥군(德興君) 왕혜(王譓)를 내세워 고려에 쳐들어오자 출정군의 식량을 조달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이듬해 삼사우사(三司右使)·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가 되었다. 1368년(공민왕 17) 좌시중(左侍中)을 거쳐 이듬해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이 되었으며, 그해 서북면도통사(西北面都統使)가 되어 동녕부(東寧府)를 정벌하였고, 1374년(공민왕 23) 공민왕이 피살되고 명덕태후(明德太后)·경복흥(慶復興) 등이 종친을 새로운 왕으로 세우려 하자 자신의 일파와 모의하여 10세의 우왕(禑王)을 추대하였다.

그러나 당시 고려에 와 있던 명나라 사신 채빈(蔡斌)이 공민왕 피살 사건을 본국에 보고하여 책임이 재상인 자신에게 돌아올까 염려해 본국으로 돌아가는 채빈을 호송관 김의(金義)로 하여금 살해하도록 하고 친원 정책을 취하였다. 이에 삼사좌윤(三司左尹) 김구용(金九容), 전리총랑(典理摠郞) 이숭인(李崇仁), 전의부령(典儀副令) 정도전(鄭道傳), 삼사판관(三司判官) 권근(權近)이 정부의 친원 정책을 비판하고, 우헌납 이첨(李詹)이인임과 찬성사 지윤(池奫)의 죄목을 열거하여 이들을 목 벨 것을 상소하였다.

그러자 최영(崔瑩), 지윤 등과 합심하여 이첨·전백영(全伯英)을 사기죄로 몰아 유배시키고, 김구용·이숭인·정몽주(鄭夢周)·임효선(林孝先)·정사도(鄭思道)·박형(朴形)·이성림(李成林)을 자신을 해치려 한다는 명목으로 유배시켰다. 반대 세력을 제거한 후 지윤·임견미(林堅味)·염흥방(廉興邦) 등과 함께 권력을 휘두르며 관직과 옥(獄)을 팔고 전국에 걸쳐 토지와 노비를 축적하는 등 탐학을 일삼았다. 이어 영삼사사(領三司事)를 거쳐 영중방사헌개성부사(領重房司憲開城府事)에 임명되었고, 1386년(우왕 12)에는 다시 좌시중이 되었다가 이듬해 노병으로 사직하였다.

1388년(우왕 14) 염흥방의 가노(家奴) 이광(李光)이 주인의 권세를 배경으로 전 밀직부사 조반(趙胖)의 토지를 빼앗자 이에 격분한 조반이 이광을 죽인 일이 있었다. 이에 염흥방조반을 국가모반죄로 몰아 순군에 가두고 심하게 고문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를 계기로 그동안 기회를 엿보던 최영·이성계 등이 오히려 염흥방, 임견미, 왕복해(王福海) 등을 처단하고 그 일파를 유배시켰는데 이때 이인임도 경산부(京山府)[현 고령군 성산면]에 안치되었다가 곧 세상을 떠났다.

[상훈과 추모]

1359년 홍건적을 격퇴하여 2등 공신에, 1361년 홍건적의 2차 침입 때 개경을 탈환하는 데 공을 세워 1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1365년(공민왕 14) 순성동덕보리공신(純誠同德輔理功臣)의 호를 받았다. 1369년(공민왕 18) 동녕부를 정벌한 공으로 광평부원군(廣平府院君)에 책봉되었다. 시호는 황무(荒繆)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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