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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령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900831
한자 李景齡
영어음역 Yi Gyeongryeong
이칭/별칭 인로(仁老)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고령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병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의병|무신
출신지 경상북도 고령군 쌍림면
성별
생년 1541년연표보기
몰년 1597년연표보기
본관 여주
대표관직 사복시정

[정의]

조선 전기 고령 출신의 의병이자 무신.

[가계]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인로(仁老). 고려 말 현조(顯組)인 안동장군(安東將軍) 이미숭(李美崇)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이광영(李光榮)이다.

[활동사항]

이경령(李景齡)[1541~1597]은 지금의 고령군 쌍림면에서 태어났다. 소년 시절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용력(勇力)이 출중하였으며 무예를 익혀 솜씨가 비범하였다. 그러나 신왕조(新王朝)에 항거한 이미숭의 자손들은 자연 신분적인 제약을 받고 벼슬길도 막혔다. 이경령도 예외가 아니어서 불혹(不惑)이 넘은 나이에도 진주의 영리(營吏)로 머물고 있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을 일어나자 향병을 모집한 후 의병장 정기룡 장군의 군진으로 달려가서 그의 아장(亞將)이 되어 각지의 전투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는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가 되어 관군을 지휘하는 정기룡 장군의 막하(幕下)에서 참모로서 활동하였는데, 전술과 무예로써 수없이 많은 전과(戰果)를 올렸다. 진주 아동령 전투에서 병사를 인솔하고 매복한 뒤 활을 쏘아 적을 섬멸하였으며, 거창으로 이동하는 적의 대군을 맞아 진주·단성·삼가 등지에서 치른 복병전에서 많은 전과를 걷어 조정의 은전을 입었다. 정기룡 장군의 주청으로 “먼저 향리를 면한다[先以免鄕]”라는 왕명이 내려 고려시대 훈구 가문의 명예를 되찾게 되었다.

또한 거창의 우척 전투에서는 불리한 지형에서도 뛰어난 전략 전술로 적의 예봉을 꺾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경상우도의 전세가 승기를 굳혀 갈 무렵에 기강 전투가 일어났다. 김해에 주둔한 왜적이 강을 따라 배를 타고 창녕과 초계 등지로 이동하는 것을 공격하라는 정기룡 장군의 명령을 받들어, 의병장 이대기와 합세한 후 팔계의 창진(倉津)에서 적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묘소]

묘소는 고령군 시명곡산(時明谷山)에 있다.

[상훈과 추모]

임진왜란 당시 정기룡 장군을 보좌한 공으로 가문의 명예를 되찾게 되었으며, 이후 낭관의 벼슬을 받았다. 전사한 후에는 수문장 겸 사복시정(守門將兼司僕侍正)에 증직되었다. 1603년(선조 36) 두 권의 ‘충효문(忠孝文)’을 하사하였으나, 6·25전쟁 때 모두 소실되었다. 1959년 이경령의 창의(倡義)의 뜻을 추모하기 위하여 고령군 대가야읍 중화리에 후손들이 명곡재(明谷齋)를 세웠다.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4.07.25 내용 수정 선무원종공신 녹권 내용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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