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2011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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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英 |
영어음역 | Bak Yeong |
이칭/별칭 | 자실(子實),송당(松堂),문목(文穆)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생곡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용만 |
성격 | 무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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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생곡리 |
성별 | 남 |
생년 | 1471년 |
몰년 | 1540년 |
본관 | 밀양 |
대표관직 | 동부승지 |
[정의]
조선 전기 구미 출신의 무신.
[가계]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자실(子實), 호는 송당(松堂). 좌찬성 박호문(朴好問)의 증손이다. 외할아버지는 양녕대군(讓寧大君), 아버지는 이조참판 박수종(朴壽宗)이다.
[활동사항]
박영은 어릴 때부터 활 쏘기와 말 달리기를 연마하여 무예가 특출하였다. 1492년(성종 23) 22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거쳐 조방장·황간현감·동부승지·김해부사를 역임하였다. 이후 벼슬이 영남좌절도사에 이르렀다. 평소 “말을 달리고 칼을 쓰는 것은 한 남자의 용맹에 불과하니 사람이 학문을 배우지 않으면 어찌 군자라 하리오”라고 했는데, 연산군이 성종이 직접 기르던 사슴에 활을 쏘는 것을 보고 장차 나라가 어지럽겠다고 탄식하며 벼슬을 버리고 고향 선산으로 돌아와 은거하였다.
박영의 학문과 사람됨을 알려주는 다음의 일화가 전해온다. 선산에 내려온 박영은 신당(新堂) 정붕(鄭鵬)에게 『대학(大學)』을 강의 받고 비봉산(飛鳳山) 아래 미봉사(彌峯寺)라는 절에서 오랜 세월 문을 굳게 닫고 공부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어느 날 『대학』을 읽은 횟수가 점차 늘어 『대학』의 참뜻인 ‘격물치지(格物致知,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그 참뜻을 깨닫는다는 뜻)’를 알 무렵 정붕이 찾아와 “그동안 만 번을 읽었지?”하고 묻자 “모레면 끝날 듯합니다.”하였다.
며칠 후 다시 찾아와 “지난 가을 내가 저 냉산(冷山)을 가리키며 저 산 바깥에 무엇이 있겠느냐고 물었을 때 자네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네. 이제 그만큼 공부를 하였으니 짐작이 있을 것이야, 다시 한 번 대답해 보게." 하자 “산 밖에는 다시 산이 있을 것입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대답을 들은 정붕은 박영을 크게 칭찬하고 손을 잡으며 “자네 글 읽은 공을 알겠다.” 라 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유명한 ‘냉산문답(冷山問答)’이다.
또 이어 “이제 어떤 공부를 원하는가?” 라는 질문에 "의학을 공부해야겠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 이유로 마을에 훌륭한 의원이 없어 귀중한 생명을 잃는 사람이 많으며 의원이 있다 해도 이름 있는 양반 집에만 드나들고 가난한 백성은 부모에게 약 한 첩 못 쓰는 형편이라 불우한 사람들을 돕기로 했다고 하자, 정붕은 박영의 높은 뜻에 탄복하였다고 한다. 그 후 실제로 의학을 공부하여 병에 시달리는 많은 생명을 구했다. 후세 사람들이 이러한 박영의 높은 덕을 기려 ‘대학동자(大學童子)’라 불렀다고 한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문목(文穆)이며, 사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미수(眉叟) 허목(許穆)이 신도비를 찬술하였으며 금오서원(金烏書院)에 향사되었다. 생전에 공부하던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신기리 낙동강변의 송당정사(松堂精舍)에서 제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