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2013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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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張應一 |
영어음역 | Jang Eungil |
이칭/별칭 | 경숙(經叔),청천당(聽天堂),문목(文穆)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인호 |
[정의]
조선 후기 구미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경숙(經叔), 호는 청천당(聽天堂). 장금용(張金用)의 후손이며 증이조참판 장계증(張繼曾)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장열(張烈), 아버지는 월포(月浦) 장현도(張顯道), 어머니는 이부춘(李富春)의 딸이다. 종숙부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에게 입양되었다.
[활동사항]
장응일은 7세 때 장현광에게 입양되어 가학을 이었다. 1629년(인조 7) 별시 문과에 급제한 뒤 1632년 승문원부정자를 시작으로 1633년 유곡찰방을 지냈다. 생부의 상을 마치고 1636년 승문원부정자, 1637년 승문원저작이 되었다가 다시 양부의 상을 당하였다.
1640년 이후 내직으로는 여러 관직을 거쳐 우부승지에 이르렀다. 1653년 삼척부사로 나갔다가 다시 예조참의가 되었다. 1660년 금산군수를 역임하였으며 1646년 헌납 재직시 사사(賜死)의 명이 내려진 소현세자빈 강씨(姜氏)를 위해 구명소(救命疏)를 9일간 계속 올렸다. 이 일로 인해 조야에서 장응일을 ‘청천백일 장헌납(靑天白日 張獻納)’이라고 하였다.
1649년(인조 27) 장령으로 임명되자 훈신 김자점(金自點)의 탐욕을 논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1673년 효종의 능인 영릉(寧陵)에 변고가 있자 장례 때 부실하게 감독을 한 대신들의 죄를 청하였다가 무고를 당하여 황간으로 유배되었다. 1675년(숙종 1) 귀양에서 풀려나 우승지, 대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1676년 부제학과 대사성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장응일은 처음 벼슬에 나갈 때 장현광이 격려하기 위해 적어준 ‘충의공약(忠義恭約)’이라는 네 글자를 평생 마음에 새겨 잊지 않았다. 문집으로는 『청천당선생문집(聽天堂先生文集)』이 있다.
[상훈과 추모]
묘소는 성주군 월항면 안포리 독산에 있다. 시호는 문목(文穆)이며, 사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묵헌(黙軒) 이만운(李萬運)이 묘갈명을 지었으며, 신도비는 경상북도 구미시 인의동 535번지에 있으며 신도비문은 성호(星湖) 이익(李瀷)이 지었다. 경상북도 구미시 인의동에 생전에 지었던 청천당(聽天堂)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