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2015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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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善山郭氏 |
영어의미역 | Seonsan Gwak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
집필자 | 김용만 |
성씨시조 | 곽우현(郭佑賢)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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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곽우현을 시조로 하는 경상북도 구미 지역의 세거 성씨.
[개설]
선산은 신라 눌지왕 때 일선군(一善郡)이라 칭하였고, 614년(진평왕 36) 주(州)로 승격되었지만 687년(신문왕 7)에 폐지되었다. 757년(경덕왕 16) 숭선군(崇善郡)으로 이름을 고쳤으며, 995년(성종 14)에 다시 선주(善州)로 고쳤고, 1018년(현종 9) 상주의 속주가 되었다. 1143년(인종 21)에 일선현으로 강등되었다가 다시 지선주군사(知善州郡事)로 승격되었다. 1413년(태종 13)에 선산군이 되었고 2년 뒤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연원]
고려 시대에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문하시중평장사겸태자첨서(門下侍中平章事兼太子詹書)를 지낸 서천(西川) 곽우현(郭佑賢)이 선산군(善山君)에 봉해져 선산곽씨(善山郭氏)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선산곽씨는 신라 때 시중(侍中)을 지낸 곽상(郭祥)을 시조로 하는 청주곽씨와는 그 계통을 달리한다.
1743년(영조 19) 계해보를 만들 때 포산곽씨와 족보를 합쳐 본관을 포산(苞山)으로 통일했으나, 그 뒤 세계간의 연대차가 발견되어 1782년(정조 6) 임인보(壬寅譜) 발간 때부터 곽우현을 시조로 하고 있다. 또한 기미보에서는 다음과 같이 선산곽씨의 시조 곽우현을 현풍곽씨의 시조 암곡공(岩谷公)의 6세손으로 이을 수 없음을 밝히고 있다.
“서천공의 장인 유공(庾公)이 평장사가 된 연대보다 116년 뒤 암곡공이 과거에 올랐다 함은, 결과적으로 서천공이 암곡공보다 70~80년 앞선 인물이 되어 모순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서천공의 손자인 상장군공(上將軍公) 곽원(郭元)이 당숙인 암곡공의 7세손 석천공(石川公) 곽지진(郭之振)이 성절사(聖節使)로 원나라에 들어간 때보다 143년 전에 급제하였으니, 당질이 백수십 년 전의 인물이 되어 모순된다.”
선산곽씨는 고려조에 명신을 많이 배출한 명문이다. 곽수원(郭綏元)은 삼사좌윤(三司左尹) 벼슬에 있다가 고려가 멸망하자 충청북도 옥천의 구룡촌에 들어가 절의를 지켰다. 문의현령으로 선정을 베푼 청백리 곽지겸(郭之謙), 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조헌의 휘하에서 큰 공을 세우고 순절한 곽자방(郭自防)과 그의 아버지 곽언(郭諺), 효행으로 널리 알려진 곽재향(郭在享)·곽진우(郭鎭祐)와 그의 아들 곽필수(郭弼洙) 등이 대표적이다.
또 곽은(郭垠)은 춘당시 문과에 급제하여 서장검관(書狀檢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사헌부지평·사간원헌납·성균관전적·사헌부장령과 사헌부집의를 역임하였다. 외직으로 담양부사로 나갔다가 승정원동부승지겸경연참찬관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기 전 세상을 떠났다.
[현황]
1976년 병진대동보(丙辰大同譜) 편찬 때 대종회 의결로 현풍으로 명칭을 통일하려고 했으나 선산 곽씨(善山 郭氏)는 분관조 곽우현(郭佑賢)을 곽경의 6대손으로 연계하면 연대가 맞지 않는다 하여 1979년에 별도로 족보를 편간하였다.
[관련유적]
곽자방 정려, 삼사좌윤 곽수원 묘비, 창주서원(滄州書院), 연동사(淵洞祠), 곽명부사(郭明府祠), 삼계서원(三溪書院), 삼양서원(三陽書院)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