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7000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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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熊津泗沘期百濟-關門-群山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전라북도 군산시 |
시대 | 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곽장근 |
[개설]
삼국 시대 때 군산은 백제(百済)의 영역으로 시산군(屎山郡)[현 전라북도 군산시 임피면의 백제 시대 이름]과 마서량현(馬西良県)[현 전라북도 군산시 옥구읍의 백제 시대 이름], 부부리현(夫夫里県)[현 전라북도 군산시 회현면의 백제 시대 이름]의 행정 치소가 있었다. 삼국 시대 때 마한(馬韓)의 영토에서 백제의 영역으로 편입됐으며, 그 시기는 온조왕(温祚王) 대라는 기록과 달리 4세기 말엽을 전후한 근초고왕(近肖古王) 대로 추정된다. 근초고왕의 남진 정책에 따라 군산을 포함한 전북 서부 지역이 백제에 정치적으로 편입되면서 마한의 지배층 무덤인 말무덤이 일시에 자취를 감춘다. 757년(경덕왕 16) 경덕왕이 행정 구역을 개편할 때 임피군(臨陂郡)과 옥구현(沃溝県), 회미현(澮尾県)[현재 회현면]으로 그 이름이 각각 바뀌었다. 임피군은 옥구현과 회미현을 비롯하여 함열현(咸悦県)까지도 거느리고 있었다.
군산시 조촌동·신관동·내흥동, 성산면 여방리·도암리, 옥구읍 옥정리, 나포면 장상리, 대야면 산월리, 옥산면 당북리, 서수면 관원리에서 백제 고분이 조사되었다. 특히 산월리는 마한이 백제에 어떻게 복속되었는가와 당시의 사회상을 밝히는 데 좋은 고고학 자료를 제공해 주었다. 그리고 여방리에서 은제 팔찌와 순금제 화판장식, 조촌동에서 금동제 귀고리, 산월리에서 6점의 고리자루 큰칼[換頭大刀]가 출토되었다.
군산 일대에 지역적인 기반을 둔 토착 세력 집단은, 백제가 도읍을 한성에서 웅진으로 천도 한 이후 백제의 대내외 관문지로서 그 역할이 높아지게 됨에 따라, 이를 발판으로 백제의 중앙 세력과 긴밀한 교류 관계를 맺으면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군산과 그 주변 지역에 밀집 분포된 관방 유적과 분묘 유적이 그 개연성을 증명해 준다. 삼국 시대 때 군산은 소금 생산 등 해양 경제와 그물 조직처럼 잘 갖춰진 교역망을 발판으로 해양 경제의 중심지이자 전략상 요충지로서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해상 교통로와 내륙 수로의 허브 역할]
강과 바다는 과거의 고속 도로이다. 군산은 만경강(万頃江)을 중심으로 북쪽에 금강(錦江), 남쪽에 동진강(東進江), 서쪽에 서해 등 4개의 고속 도로를 거느린 교통의 중심지이다. 금남 호남 정맥(錦南湖南正脈)의 신무산(神舞山)[897m] 뜬봉샘에서 발원한 금강은 백제의 고도인 공주·부여를 거쳐 군산에서 서해로 흘러든다. 금남 정맥(錦南正脈)의 밤샘과 호남 정맥(湖南正脈)의 까치샘에서 각각 발원하는 만경강과 동진강도 호남 평야(湖南平野)를 넉넉하게 적셔주고 새만금 해역에서 서해로 들어간다. 새만금 해역은 군산도 동쪽 바다로 금강·만경강·동진강 하구와 그 주변 지역이 여기에 해당된다.
새만금 해역에 그물망처럼 잘 구축된 천혜의 교통망을 발판으로 마한 부터 백제까지 해양 문화가 화려하게 꽃 피웠다. 금강·만경강·동진강 내륙 수로와 해상 교통로가 잘 갖춰져 삼국 시대까지 연안 항로가 그 이후에는 조선술과 항해술의 발달로 군산도를 경유하는 횡단 항로와 사단 항로가 발달했다. 동시에 환 황해권의 중앙부에 위치한 지정학적인 이점을 살려 선사 시대부터 줄곧 문물 교류의 허브 역할을 담당해 왔다. 그리하여 우리나라에서 가장 역동적인 해양 문화와 해양 경제의 발전상을 보였다.
호남 평야의 심장부인 김제·만경 평야를 달리 금만 평야라고 부르는 데, ‘새만금’은 ‘금만’이라는 말을 ‘만금’으로 바꾼 것이다. 그리고 새롭다는 뜻의 ‘새’를 덧붙여 만든 신조어이다. 오래 전부터 기름진 땅으로 유명한 만경·김제 평야와 같은 옥토를 새로이 일구어 내겠다는 의미가 그 속에 담겨있다. 전북의 최대 화두인 새만금 사업을 위해 1991년 착공된 새만금 방조제가 통과하는 금강과 만경강, 동진강 하구와 군산도 일대를 새만금 해역으로 설정했는데, 그 중심부에 군산도가 있다.
군산은 다시 자연 환경과 문화 유적의 분포 양상을 근거로 임피권·옥구권·회현권·군산도로 세분된다. 전북 익산시와 인접된 임피권은 금남 정맥 왕사봉(王師峰)[718m]에서 오성산(五聖山)[227m]까지 이어진 산줄기를 경계로 금강과 만경강 유역으로 나뉜다. 군산에서 언덕 모양의 산지가 발달한 곳으로 마한·백제 문화 유적의 밀집도가 높고 그 종류도 매우 다양하다. 비응도·오식도 등 도서 지역을 포함하는 옥구권은 밀물 때 금강과 만경강이 서로 연결되면 본래 섬이었을 것으로 점쳐진다. 월명산(月明山)[112m]에서 영병산(領兵山)[126.3m]까지 뻗은 산자락에 마한의 생활 유적과 분묘 유적을 중심으로 서쪽 기슭에 패총이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임피권과 옥구권 사이에 위치한 회현권은 마한 부터 백제까지의 문화 유적이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 일제 강점기부터 시작된 간척 사업으로 육지가 됐지만, 본래 섬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한부터 백제까지 발전상, 산월리]
마한 부터 백제까지 군산의 발전 과정을 한눈에 살필 수 있는 곳이 군산 산월리이다. 대야 공용 터미널 동쪽에 남북으로 뻗은 산자락 정상부로 임피권 서쪽 가장 자리에 위치한다. 2001년부터 군산 문화원과 문화재청의 발굴비 지원으로 세 차례의 학술 발굴에서 마한의 생활 유적과 분묘 유적, 백제의 분묘 유적이 조사됐다. 마한의 생활 유적이 폐기되고 그 위에 백제의 분묘 유적이 조성됐는데, 이곳에서 북쪽으로 200m 떨어진 곳에 마한의 분묘 유적이 있다.
백제 근초고왕의 남진 정책으로 마한이 백제에 정치적으로 복속되는 과정에 분묘 유적의 위치도 커다란 변화를 보인다. 금강 하류 지역에서 구덩식 돌덧널 무덤[竪穴式 石槨墓]가 더욱 커지고 5세기 중엽 경 굴식 돌방무덤[横穴式 石室墳]이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마한 부터 한성기까지의 분묘 유적은 대체로 산자락 정상부에 입지를 두었다가 웅진·사비기를 거치면서 남쪽 기슭으로 이동한다. 군산 산월리는 산자락 정상부에 입지를 두고 있기 때문에 마한의 전통적 묘제가 그대로 계승된 한성기 백제의 분묘 유적으로 판단된다.
군산 산월리에서 3기의 구덩식 돌덧널 무덤와 7기의 굴식 돌방무덤이 조사됐다. 굴식 돌방 무덤은 생토 암반층을 파내어 묘광을 마련하고 그 내부에 정사각형[方形] 혹은 직사각형[長方形]의 석실이 축조된 지하식이다. 석실의 보존 상태가 가장 양호한 산월리 고분군 2호분은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할석(割石)을 가지고 위로 올라가면서 벽석을 약간씩 들여쌓고 한 매의 덮개돌로 덮었다. 무덤으로 들어가기 위한 길은 그 길이가 짧고 모두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으며, 8호분은 서울 가락동 고분군 4호분과 공주 보통골 고분군 17호분과 흡사하게 남벽과 서벽 사이에 비스듬히 무덤으로 들어가기 위한 길을 두었다. 유구(遺構)의 속성에서 백제 고분의 정형성보다 오히려 과도기적인 특징을 강하게 보였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조에 “소나 말을 탈 줄을 모르며 사람이 죽어 장사지내는데 소나 말을 사용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마한 사람들은 소나 말을 탈 줄 몰랐지만 사람이 죽어 장사 지낼 때 소나 말 뼈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산월리 2·3호분에서 말 이빨과 말 뼈가 부장된 상태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마한의 매장 풍습인 말뼈를 부장하는 풍습이 백제 고분에서 확인된 것은 마한과 백제의 계기적인 발전 과정을 방증해 주었다. 백제의 진출로 마한의 토착 세력 집단이 굴식 돌방무덤이라는 새로운 묘제를 수용했지만 말뼈를 부장하는 마한의 매장 풍습이 그대로 계승되었음을 알 수 있다.
군산 산월리에서 토기류와 철기류, 구슬류 등 6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됐다. 백제의 분묘 유적 중 유물의 출토량이 가장 많고 그 종류도 매우 풍부하고 생각 할 수 있다. 백제의 중앙과 지방을 비롯하여 왜계(倭系)도 포함된 토기류는 달리 ‘백제 토기 박물관’으로 불릴 정도로 대부분의 기종이 망라되어 있다. 도굴의 피해를 입지 않은 2호분은 시신을 모신 목관이 안치된 부분을 제외하면 유물이 부장되어 추가장이 확인됐다. 1970년대 예비군 훈련장을 조성하면서 유구가 심하게 훼손됐지만 유물이 다량으로 출토됐다.
서울 풍납 토성과 부안 죽막동에서만 출토된 횡병(横瓶)은 2호분에서 2점이 함께 출토되어 큰 관심을 끌었다. 8호분 대부 장경호는 산월리 출토품이 유일하며, 아직껏 다른 유적에서 출토된 예가 없다. 백제 토기의 상징적인 기종인 삼족 토기는 모두 15점으로 배신의 직경이 10㎝~30㎝로 매우 다양하다. 전주 마전과 완주 상운리 등 만경강 유역과 청주 신봉동, 공주 수촌리 등 금강 유역의 내륙 문화 요소가 모두 확인되어 토기류 조합상을 근거로 군산의 역동성이 확인됐다.
군산 산월리 가장 큰 특징은 철기류의 종류가 풍부하고 그 출토량이 많다는 점이다. 3세기 이후에는 철기의 생산 규모가 더욱 확대되었으며, 그 이전 시기보다 더욱 정교한 제철과 야금 기술을 가진 전문 장인 집단의 등장으로 다양한 철제 농구와 철제 무기가 갑자기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무덤에 철기류를 풍부하게 넣어 주는 매장 풍습은 마한의 상징적인 매장 풍습이다. 군산을 무대로 마한의 소국으로까지 발전했던 해양 세력이 백제 한성기까지 그 발전 속도를 멈추지 않고 융성했음을 뒷받침해 주었다.
마한의 상징적인 무기류로 제철 기술이 발달하고 전쟁이 잦아지면서 그 길이가 길어졌으며, 3세기 후반 대 이후 중요한 전쟁 무기이자 신분을 상징하는 도구다. 고리 자루 부분[環頭部]에 장식된 문양의 종류에 따라 삼엽문·용문·용봉문·봉황문으로 세분된다. 마한의 표식적인 위세품으로 알려진 고리자루 큰칼은 2호분에서 1점과 3호분에서 2점, 4호분에서 1점, 6호분에서 2점 등 6점이 출토됐다. 모두 둥근 고리 형태 부분에 문양이 없는 소환식으로 군산의 역동성과 함께 산월리의 지역성을 강하게 담고 있다. 굴식 돌방무덤에서 고리자루 큰칼이 다량으로 출토된 것은 아마도 산월리가 처음이다.
구슬류는 모두 253점이 출토됐는데, 백제의 굴식 돌방무덤에서 구슬이 풍부하게 부장된 것은 마한의 매장 풍습 영향으로 보인다. 좀 더 구체적으로 구슬의 출토 현황을 정리하면 2호분에서 4점과 3호분에서 147점, 4호분에서 8점, 5호분에서 16점, 6호분에서 41점, 7호분에서 29점, 8호분에서 8점이 출토됐다. 아마도 백제의 분묘 유적에서 산월리 만큼 구슬류가 다량으로 출토된 곳은 많지 않다. 마한 부터 백제까지 군산의 계기적인 발전 과정이 산월리에서 출토된 구슬류를 통해서도 입증됐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마한 사람들은 구슬 목걸이를 보배로 삼는데 옷에 꿰매 장식하기도 하고 혹은 목에 매달기도 하고 귀에 달기도 한다. 금·은·비단은 보배로 여기지 않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근거로 마한 사람들은 금·은·비단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구슬류를 보배로 생각했던 것 같다. 익산 송학동 6-1호 마한의 주거지에서 구슬을 만드는 데 사용된 거푸집이 출토되어 마한의 구슬 제작을 유물로 확인시켰다.
군산 산월리는 마한과 백제의 생활 유적과 분묘 유적이 동일 유적에서 함께 조성되어, 마한이 백제에 어떻게 복속됐는가와 당시의 사회상과 생활상을 밝히는 데 좋은 고고학 자료를 제공해 주었다.
[군산, 백제 분묘 유적의 보물 창고]
1993년 군산시 조촌동 지구 택지 개발 공사 중 우연히 백제 고분이 절단면에서 모습을 드러내 그 존재가 처음 알려졌다. 군산 시청 동쪽 매미산[56m] 남쪽 기슭에 입지를 둔 분묘 유적으로 마한 부터 백제까지 군산 지역 묘제의 변천 과정이 처음으로 밝혀졌다. 마한의 주구 움무덤[周溝土壙墓]와 독무덤[甕棺墓], 백제의 구덩식 돌덧널무덤·굴식 돌방무덤·앞트기식 돌방무덤[横口式石槨墓] 등 다양한 무덤이 망라되어 있다. 마한의 주구움무덤와 독무덤은 산자락 정상부에, 백제의 고분은 대체로 남쪽 기슭에 입지를 두었다.
백제 고분은 그 평면 형태가 직사각형과 가는 직사각형[細長方形]으로 나눌 수 있으며, 벽석은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할석과 판석형 석재까지 다양하다. 벽석의 축조 방법과 석실의 평면 형태에서 웅진 시기부터 사비 시기까지 백제 고분의 전개과정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줬다. 유물의 출토량은 그다지 많지 않았지만 3호분 관고리의 출토 상태를 근거로 추가장이 명확하게 확인됐다. 구릉지 정상부에 마한의 주구움 무덤와 도랑[溝状遺構]이 자리하고 있는 점에서 토성산과 관련이 깊을 것으로 추정된다.
군산 지역에서 그 규모가 가장 큰 분묘 유적이 성산면 여방리이다. 서해안 고속 도로 건설 공사로 구제 발굴이 이루어진 곳으로 대명산에서 북서쪽으로 뻗은 산자락 남쪽 기슭에 자리한다. 백제의 웅진·사비기에 속한 구덩식 돌덧널 무덤와 굴식 돌방무덤, 앞트기식 돌방무덤[横口式石槨墓], 독무덤와 널무덤[土壙墓] 등 88기의 고분이 조사됐다. 일제 강점기부터 시작된 극심한 도굴과 벽석의 반출로 유구가 심하게 유실 내지 훼손되어 유물의 출토량이 많지 않았다. 도굴의 피해를 입지 않은 7기의 처녀분에서도 유물의 출토량이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금으로 만든 화형 장식과 은제 팔찌를 비롯한 위신재(威信財)와 최초로 그 모습을 드러낸 화덕 모양 토기는 당시 시대상과 사회상을 연구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금강 하구에 내륙 수로와 해양 교류를 기반으로 발전했던 강력한 토착 세력 집단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금강을 사이에 두고 그 북쪽에 위치한 충청남도 서천군 봉선리에서도 금으로 만든 꽃모양 장식과 금으로 만든 영락 장식이 출토되어 군산시와 서천군이 전략상 요충지로서 금강 하구의 중요성을 최고로 높였다.
군산시 서수면과 익산시 웅포면은 분묘 유적의 밀집도가 높다. 금강 유역에 속한 곳으로 군산시 나포면 나포리·장상리와 익산리 웅포리·입점리가 하나의 권역을 이룬다. 1986년 익산 입점리에서 금동제 관모와 금동제 신발이 고등학생에 의해 발견, 매장 문화재로 신고 되어 몇 차례의 학술 발굴을 거쳐 현재 국가 사적으로 지정됐다. 백제는 마한의 세력을 복속시키는 과정에 마한의 중심 지역 수장을 지배 내지 통제하기 위해 최고의 위세품인 금동제 관모를 보낸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위세품의 확산과 중국제 도자기 등장, 백제 토기의 확산은 고대 국가로 성장한 백제의 진출에 따른 마한 세력의 복속 과정을 대변해 준다.
익산 입점리 서쪽에 인접된 나포면 나포리 일대에도 백제계 고분이 광범위하게 분포된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에 조속한 학술 발굴이 요망된다. 익산 웅포리 학술 발굴에서 한성기 궁륭상 굴식 돌방무덤이 그 모습을 드러내 금강 하류 지역의 역사적인 위상을 최고로 높였다. 금강 유역에 지역적인 기반을 둔 토착 세력 집단은 해상 교통로와 내륙 수로로 백제의 중앙과 긴밀한 교류 관계를 바탕으로 발전한 해양 세력으로 추측된다. 동시에 백제가 웅진으로 도읍을 옮기는 과정에 주도적인 역할과 함께 든든한 배경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옥구권은 백제 마서량현으로 757년(경덕왕 16) 옥구현으로 그 이름이 바뀌었다. 마한의 최대 거점 지역인 옥구권에서 백제 분묘 유적의 존재가 여전히 발견되지 않고 있어 많은 궁금증을 자아낸다. 군산 대학교 서쪽 남북으로 뻗은 산줄기 정상부인 군산 신관동에서 주구를 두른 합구식 독무덤[合口式甕棺墓]이 조사됐다. 옥산면 당북리 백석제 북쪽 산자락 정상부에서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할석만을 가지고 벽석을 쌓고 그 주변에 주구를 돌린 2기의 지상식 백제 고분이 조사됐다.
옥구읍 옥정리와 미제 저수지 서쪽에 남북으로 뻗은 산줄기 남쪽 기슭에서 판석형 할석을 가지고 벽석을 쌓은 사비기 굴식 돌방무덤이 조사됐다. 마한의 묘제적인 속성이 강하게 담긴 독무덤와 지상식 돌방무덤[地上式石室墳], 백제 후기의 굴식 돌방무덤이 조사되어 옥구권의 다양성이 확인됐다. 그렇지만 백제 마서량의 행정 치소로 추정되는 옥구읍 상평리 일대에서 백제 분묘 유적의 존재가 발견되지 않아 아쉬움을 더해 준다. 앞으로 옥구권에 설치된 백제 마서량현의 성격을 밝히기 위한 지표 조사 및 발굴 조사가 절실히 요망된다.
임피권과 옥구권 사이에 위치한 회현권이다. 백제 부부리현의 행정 치소로 통일 신라 시대 때 회미현[현재의 회현면]으로 그 이름이 바뀌었고, 조선 시대 옥구현으로 편입될 때까지 독립된 행정 구역을 그대로 유지했다. 아직까지 회현권에서 한 차례의 발굴 조사도 이루어지지 않아 백제 부부리현의 실상과 그 역사성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있다. 이제까지의 지표 조사에서 군산시 회현면 소재지 일대에 마한 부터 백제까지의 문화 유적이 집중적으로 분포된 것으로 밝혀졌다.
군산 대정리·고사리·남내리 등 10여 개소의 분묘 유적은 대부분 남쪽 기슭에 입지를 두어 백제 고분의 속성을 강하게 담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들 분묘 유적은 대체로 지형이 완만한 남쪽 기슭 하단부에 입지를 두고 있는 점에서 서로 강한 공통성을 보인다. 본래 회현권에 지역적인 기반을 둔 토착 세력 집단은 줄곧 해양 교류 및 해양 경제를 기반으로 발전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아마도 만경강 내륙 수로의 관문이라는 지정학적인 이점에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점쳐진다.
[군산의 매장 문화재에 큰 관심과 지원을]
백제에 이르러서도 마한의 역동성이 그대로 계승됐다. 군산시 대야면 산월리에서 산자락 정상부에 입지를 둔 분묘 유적과 구슬류 및 철기류의 풍부한 부장, 무덤에 말뼈를 넣는 매장 풍습에서 마한과 백제의 계기적인 발전 과정이 입증됐다. 한성기 때는 서해의 연안 항로로 백제의 중앙과 교류 및 교섭이 활발하게 이루어져 산월리에서 백제계 유물과 함께 백제의 중앙 묘제가 그대로 수용됐다. 그리고 내륙 수로의 발달로 금강과 만경강 유역의 내륙 문화 요소가 백제의 분묘 유적에서 함께 확인됐다.
그러다가 공주로 도읍을 옮긴 이후에는 백제의 대내외 교류 관문으로 막중한 역할을 담당함에 따라 임피면에 시산군과 옥구읍에 마서량현, 회현면에 부부리현이 설치됐다. 백제의 시산군과 마서량현, 부부리현 등 3개소의 행정치소가 설치될 정도로 그 역사적인 위상이 높았다. 새만금 해역에 속한 군산도는 백제 부터 고려까지 해양 문물 교류의 허브이자 해상 교통의 기항지로 다른 섬들에 비해 조개무지와 분묘 유적의 밀집도가 높다. 동시에 삼국 시대 조개무지의 밀집도가 가장 높은 곳이 군산이다.
군산을 중심으로 한 새만금 해역은 백제 웅진기·사비기 때 백제의 대내외 관문지로서 줄곧 큰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다가 757년(경덕왕 16)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시산군이 임피군, 마서량현이 옥구현, 부부리현이 회미현으로 그 이름이 바뀌었다. 당시 임피군은 옥구현과 회미현을 비롯하여 함열현까지도 거느린 행정상 최고 중심지였다. 1500년 전 군산의 행정 일 번지는 군산시 임피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