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110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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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공식명칭 | Manguri Gogae Singing Human Feelings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기도 구리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서종원 |
[정의]
경기도 구리시 망우리고개의 역사와 그 길에 담긴 이야기.
[서울을 오가는 길에 마주치는 망우리고개]
어느 지역이든 길이 갖는 의미는 남다를 수밖에 없다. 길을 통해 다른 지역과 소통을 하고,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을 다른 지역과 주고받는다. 지금이야 신작로가 생겨 차들이 쌩쌩 달리지만 예전엔 주로 몇 사람이 오갈 수 있을 정도 넓이의 길이 대부분이었다. 비록 오늘날에 비해 길이 좁긴 하나 예나 지금이나 길은 주민들에게 무척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구리시의 ‘구리(九里)’라는 명칭은 1914년 일제 강점기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경기도 양주군 망우리면(忘憂里面)과 구지면(九旨面), 그리고 노해면(蘆海面)의 일부 지역을 병합하고 구지면의 '구'자와 망우리면의 '리'자를 합하여 구리면이라 한 데서 유래하였다. 구리시는 동쪽으로는 남양주시, 서쪽과 남쪽에는 서울시, 북쪽으로는 남양주시와 접하고 있다. 지형적으로는 서쪽으로 아차산·망우리고개 등을 두고 서울특별시와 인접해 있고, 남쪽으로 한강을 끼고 있으며 동쪽으로 왕숙천이 남쪽을 향해 가로질러 흐르고 있다. 이러한 입지적 특성 때문에 구리 지역은 육로는 물론 해로를 통해 일찍부터 물자와 사람의 왕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해상으로는 남쪽으로 흐르는 한강의 영향이 큰데, 이러한 해로는 육로 못지않게 구리 주민들의 삶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외부와 소통할 수 있는 여러 갈래의 길 가운데 구리 주민들이 오래전부터 이용했던 길은 망우리고개를 넘어 다니는 길이다. 이 길은 서울의 관문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서울 사람들은 이 길을 통해 강원도를 오갔다. 그리고 과거 구리 주민들에게 있어 이 길은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특히 대부분의 주민들이 서울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구리 주민들에게 있어 서울이 미치는 영향은 절대적이다. 지역에서 재배한 채소며 과일 등을 주로 판매하던 곳도, 필요한 물자를 구입하던 곳도 바로 서울이었다. 이러한 역사는 조선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조선 시대의 왕들이 묻혀 있는 동구릉이 구리 지역에 자리하고 있는 것만 보더라도 구리시와 수도 서울의 관계가 긴밀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교육 시설이 부족하던 시절에는 구리 지역 학생들은 서울에 있는 중학교로 진학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구리 지역 학생들이 주로 진학했던 학교는 청량 중학교와 광신 중학교였다. 그 당시 중학교를 다니던 학생들 대부분은 망우리고개를 넘어 몇십 리 길을 걸어 다녔다. 운 좋게 차량 뒤에 매달려 통학을 한 적도 있지만 그런 일은 일 년에 한두 차례에 불과하였다.
육로를 통해 구리에서 서울로 가는 길에 마주하는 망우리고개는 행정 구역상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동과 경기도 구리시의 경계에 위치한 고개이다. 망우동 동쪽에 자리 잡은 산이 바로 망우산[281m]인데, 이 산의 능선을 경계로 경기도와 서울로 나뉜다. 망우리고개는 결국 양평과 가평 등을 비롯해 강원도 방면에서 서울로 가기 위해 넘어야 하는 고개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망우리고개는 구리 주민들뿐만 아니라 경기도 동부와 강원도 주민들에게도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길이다.
[망우리고개의 역사와 변화 과정]
육로로 서울을 오가는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망우리고개는 조선 태조 이성계와 관련이 있다. 비록 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긴 하나 망우리고개의 ‘망우(忘憂)’라는 명칭 역시 그 무렵부터 붙여졌다고 한다. 설화의 대강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종묘 사직을 마련한 후, 선왕들의 능지를 정하기 위해 대신들과 함께 현재의 동구릉 자리를 답사하였다. 그런데 무학 대사는 그 자리가 선왕의 능지보다는 태조의 신후지지(身後支地)로 더 적합하다고 권고하였다. 태조는 무학대사의 권고를 받아들여 자신의 능지로 결정하였다. 기쁜 마음으로 환궁하던 중 지금의 망우 고개 위에서 잠시 발길을 멈추고 자신의 능지로 결정한 곳을 바라보니 과연 명당이었다. 이에 태조가 “이제는 근심을 잊게 됐다.”라고 경탄한 데서 ‘망우(忘憂)’라는 이름이 붙게 됐다.[국립 민속 박물관, 『한국 민속 문학 사전: 설화 편』]
하지만 왕릉터가 태조의 사후에 결정된 것이라는 내용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 어떠한 역사 자료에서도 이와 관련된 직접적인 기사를 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조선 시대의 여러 실록과 문헌에 ‘망우리고개’ 혹은 ‘망우리’ 등의 명칭만 보일 뿐이다.
『세조실록(世祖實錄)』에 "세조 9년(1463) 아차산(峨嵯山)에서 망올리(亡兀里) 고개에 거둥하여 사냥하는 것을 구경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리고『중종실록(中宗實錄)』에는 망올리(網兀里)의 초목 무성한 주변 경관을 묘사한 부분만 있다. 『숙종실록』에는 "태조께서 자손들이 뒤따라 장사지낼 곳이 20개소까지 많게 된다면 내가 이로부터 근심을 잊겠다고 하여 그곳의 가장 서쪽 한 가닥의 산봉우리를 이름하여 망우리라 하였고 그곳이 길지인 것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여지도서(輿地圖書)』 양주목에 망우리면의 위치와 호구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해동 지도(海東地圖)』와 조선 후기 지도에 고개 지명은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않고, 망우리와 망우리면의 기록만 보인다[국토 지리 정보원,『한국 지명 유래집』-중부 편].
언제부터 망우리고개가 생긴 지 알 수 없으나 여러 가지 정황을 놓고 보면 조선 시대 이전부터 있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성계의 설화나 『세조실록』에 기록된 내용을 통해 충분히 유추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의 모습은 지금과는 사뭇 달랐던 것 같다. 시대가 흐르면서 두세 사람 정도가 걸어 다닐 수 있던 고갯길이 점차 확장된 것은 아마도 일제 강점기부터일 것이다. 우마차가 생겨나고 여러 유형의 차량이 교통수단으로 활용되면서 자연스럽게 변한 것이다. 특히 망우리 고개는 서울에서 동구릉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어 인산(因山)[국상]을 치르기 위해 고갯길을 손보는 경우도 있었다. 1926년 6월 1일자 『동아 일보』 기사에 ‘인산(因山)을 압해 두고’는 이를 잘 보여 준다.
"금곡 유릉(金谷裕陵) 공사는 그간 리왕직에서 전력을 다하야 공사를 한 결과 재작 삼십일로써 광형(鑛穴)도 다 파고 여러 가지 명기(明器)를 너흔 석함(石函)을 안치할 전실(前室)도 대개 공사가 끗이 낫는데 현실(玄室)은 사위를 '콩크리트‘로 견고히 다지고 그 안에 향하야 바른편으로부터 순명 황후와 순종 황뎨를 모시고 왼편 한 자리만 비여둘 터인데 재궁을 봉안한 후에는 다시 극히 견고히 '콩크리트’로 외곽(外廓)을 만들 터인데 봉분의 직경은 삼십칠 척에 달하리라 하며 인산 행렬이 통과할 망우리(忘憂里) 고개는 길이 매우 완곡하야 대여소여가 지나갈 수 업슴으로 비교뎍 평탄한 구도(舊道)를 폭을 팔 간으로 기리 이백수십 간을 새로 만들리라더라 외국 대사 참가, 외교단 대표로 동경 주찰 외교단에서는 순종 황뎨 인산에 총대 한 명을 보내디로 되엿는데 참렬할 총대는 독일 대사 '쫄푸' 씨로 내여되였더라[동경]."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동구동 아랫말에 살던 이성근[1917년생]의 증언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성근은 순종 황제 인산일 때 금곡을 거쳐 망우리고개로 넘어오는 상여 행렬을 구경하였다.
망우리 고갯길은 그 이후에도 몇 차례 변화가 있었다. 특히 한국 전쟁을 계기로 이 고갯길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이전에 비해 도로 폭이 더 넓어졌다. 1972년도에 망우리 고갯길은 다시 확장 공사를 하였다. 당시의 공사는 6개월 정도 진행되었는데 공사가 끝난 뒤에는 6차선 35m 규모의 도로로 바뀌었다.
『경향 신문』 1972년 11월 20일 기사를 보면 서울~춘천 간의 험한 길이었던 망우리~서울·경기도 경계 간 도로 1㎞가 확장되어, 20일 오전 9시 30분 양탁식 서울 시장 등이 참석하여 준공식을 가졌다. 1972년 5월 23일 착공하여 준공된 폭 35m, 길이 1㎞의 6차선 도로로 공사비 2억 4000만 원이 투입되었고 연인원 7만 3400명과 4,455대의 장비가 동원되었다. 경사가 급하고 굴곡이 심한 길로서 교통 사고의 위험이 많았으나 도로 폭을 넓히고 경사를 낮추어 안전 도로를 이루었으며, 길 옆에 따로 5,600여 평의 주차장[1천 대 수용]도 만들어 봄가을 성묘 때 성묘객들의 불편도 덜어 주게 되었다. 이 길은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 교문리에서 워커힐~광진교로도 직접 빠질 수 있어 서울~춘천 간의 교통량을 외곽으로 분산시키는 효과도 있었다.
도로 확장 공사와 이 일대의 구획 정리 사업이 마무리 된 이후 망우리고개는 교통이 편리해졌을 뿐만 아니라 신흥 주택가와 교육 지구로 변모하였다. 특히 개발 정책에 따라 서울특별시 상봉동과 면목동의 도시화가 진척되고 구리시의 교문리(橋門里)·도농리(陶農里) 등이 개발되면서 북쪽 서울시 중랑구 신내동에 이르기까지 주택지가 조성되었다. 이 과정에서 예전 망우리고개의 모습은 나이 많은 어른들의 기억에만 남게 되었다.
[구리 주민들의 삶의 애환이 깃든 망우리고개]
망우리고개의 '망우(忘憂)'라는 용어는 근심을 잊는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더불어 모든 걱정을 잊고 쉰다는 것과 마음을 편안히 해 주는 곳이라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그런 연유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망우리고개 주변엔 오래전부터 공동묘지가 있었으며, 해방 직후에는 문둥병 환자[癩患] 150여 명을 수용하는 천막촌이 생겨나는 등 망우리고개는 한동안 어두운 이미지가 있었다.
그러나 망우리고개가 어두운 이미지만 간직한 것은 아니다. 특히 망우리고개를 넘어 서울을 오가던 구리 주민들에겐 무척 중요한 길이었다. 어떤 이는 직접 기른 채소를 들고, 나이 어린 소년은 산에서 주워 온 땔감을 지게에 지고 힘겹게 고갯길을 넘었다. 조금 과장된 표현일지 모르겠지만 구리 주민들 대부분이 망우리 고갯길을 이용해 서울을 왕래한 셈이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망우리고개를 오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고갯길 양옆으로 주막거리가 생겨났다. 주막거리에는 예쁜 색시가 있는 술집을 비롯해 국밥집 등이 즐비했다. 서울 쪽에는 부왕동에, 구리쪽에는 교문리 덕고개에 주막이 많았다고 한다. 이들 주막거리가 생긴 정확한 시점을 알 수 없으나 다음 이야기 내용을 보면 역사가 오래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과거 동구릉에 조선 시대 때 동구릉에 월급을 타 와야 되잖아 군인들도 있고 일 하는 사람들도 많고 그러니까. 그거를 누가 했나면 여기서는 황명균이라고 있어 황명균 아버지가 저기 그 경복궁 거기 궁에 가서 궁궐에 가서 이제 그걸 타 오는 거야[한 달에 한 번]. 그렇지 한 달에 한 번 쌀도 타 오고 뭐 돈 뭐 이런 걸 해서. 근데 이제 그 양반 이야기론 마차를 가지고 가면 쌀 이런 걸 잔뜩 싣고 돈 가지고 오면은 들어 갈 때는 돈이 없으니까 술집에 못 들리고 넘어오면서 저 저 동대문서부터 시작한다는 거야. [초저녁부터요?] 오면서 싣고 오면서 그러니까 돈이 있다 이거지, 그렇게 먹고 오다가 망우리 주막거리에 색시가 있으면 거기 들러서 한 잔 더 하고, 그러다가 결국 구리에 오면 빈털터리가 되었다는 거야."[구리시 향토사 연구소장 박명섭, 2016. 1. 4.]
워낙 술집이 많아서인지 구리 주민들은 망우리고개를 '술 먹고 넘어 오는 고개'로 인식한다. 힘들게 재배한 채소며 과일 등을 서울에 내다 팔고 구리로 돌아오는 길에 주막거리에서 국밥 한 그릇을 안주 삼아 술을 들이키며 하루를 마무리하였다. 푸짐한 술상은 아니었지만 삶의 고단함을 망우리고개의 주막에서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지금이야 구리와 서울을 잇는 여러 갈래의 길들이 생겨나 예전에 비해 망우리고개를 넘어 다니는 사람들은 줄었지만 구리 주민들에게 있어 망우리고개는 삶의 희로애락이 녹아 있는 소중한 길임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