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1420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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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吳挺緯 |
영어공식명칭 | Oh Jeongwi |
이칭/별칭 | 군서(君瑞),서장(瑞章),동사(東沙)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구리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미엽 |
[정의]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에 묘가 있는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오정위(吳挺緯)[1616~1692]의 본관은 동복(同福)이고 자는 군서(君瑞) 또는 서장(瑞章), 호는 동사(東沙)이다. 아버지는 관찰사 오단(吳端)이며, 어머니는 이조 판서 심액(沈詻)의 딸 청송 심씨(靑松沈氏)다. 할아버지는 이조 참판 오백령(吳百齡)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직장(直長) 오세현(吳世賢)이다. 당숙인 오전(吳竱)에게 입양되었다.
[활동 사항]
오정위는 1645년(인조 23)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이듬해인 1646년 정언(正言)이 되었다. 1649년(효종 즉위년) 경기 도사가 되었고, 1650년 『인조실록(仁祖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1651년 사헌부 지평과 홍문관 수찬이 되었고, 1652년 홍문관 부교리·수찬·대흥 현감(大興縣監)을 거쳐 1656년 이조 좌랑·사간, 1659년 승정원 승지를 역임하고 춘천 부사를 지냈다. 1661년(현종 2) 충공 감사(忠公監司)를 거쳐 1663년 승지가 되었다. 1670년 개성 유수가 되었으며, 이듬해인 1671년 경기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674년(숙종 즉위년) 형조 판서와 예조 판서를 거쳐1675년 호조 판서가 되었다.
숙종 초 서인 송시열(宋時烈)에 대한 처벌 문제로 남인이 온건파와 강경파로 분열될 때 청남(淸南)에 속하여 강경론을 지지하였다. 1679년 대사헌·공조 판서·판의금부사가 되었고, 1680년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무안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삭주(朔州)로 이배(移排)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풀려나 공조 판서에 재등용되었고, 1692년 77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묘소]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에 오정위의 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