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북루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1667
한자 拱北樓
이칭/별칭 누문,절양루
분야 생활·민속/생활,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광주광역시 북구 독립로237번길 33 [누문동 144]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수경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축|증축 시기/일시 1875년 - 공북루 중수
원소재지 공북루 - 광주광역시 북구 독립로237번길 33[누문동 144] 인근지도보기
성격 누각.
정면 칸수 5칸
측면 칸수 4칸

[정의]

조선시대 광주읍성 북문 공북문 밖에 있었던 2층 누각.

[개설]

공북(拱北)이라는 이름은 북쪽 도성에 있는 임금에 대한 충성의 의미를 담아 지은 것이다. 지리적으로 한양 남쪽에 있는 군현의 성곽 북문이나 북쪽에 위치한 루(樓)에 ‘공북’이라는 명칭을 부여한 경우가 많다. 광주 공북루공북문 위에 설치한 문루가 아니라 북문 바깥 쪽에 별도로 건립한 누각이다. 공북루는 지방 관리가 사신을 접대하거나 지방 유지들과 연회를 여는 공적인 장소로 사용되었다. '누문'은 공북루의 별칭이다. 누문동이라는 현재의 동명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절양루(折楊樓)공북루의 옛 이름이다. ‘절양(折楊)’은 버드나무를 꺾는다는 뜻으로 이별을 의미하는데, 주로 관리들이 이임하며 이별하는 장소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이 같은 이름이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위치]

광주 공북루는 현재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탑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공북루 주변에 연지를 두고 연꽃을 심었다. 누문동은 루(樓)의 문(門)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누문이 되었다. 북구 유동임동 일대 유림숲이라는 울창한 버드나무숲이 있었다.

[변천]

공북루에 대해 1879년 간행된 광주읍지는 “주의 북쪽 5리에 있다. 옛날에는 절양루라 칭하였는데 목사 오두인(吳斗寅) 때 공북으로 고쳤다. 1875년에 목사 신석유(申錫游)가 중수하였다는 기(記)가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1792년 편간된 『광주목읍지』도 같은 내용을 전하고 있는데, 이를 뒷받침하듯 18세기 무렵부터 제작된 지도들은 모두 ‘공북루’라고 표기하고 있다.

[형태]

정면 5칸, 측면 4칸의 규모였다.

[의의와 평가]

유평은 “병자년[1636년]에 의청을 광주의 절양루에 설치하였다(丙子說募義廳于光州折楊樓).”라는 통문(通文)을 여러 고을에 보냈다.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해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발발하자 병사와 양식을 모아 함께 국난을 이겨내자고 독촉한 글이다. 절양루[공북루]와 관련된 글 중 의미가 있는 기록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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