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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2116
한자 朴世英
영어공식명칭 Bak Seyeong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병남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10년연표보기 - 박세영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28년 6월 - 박세영 광주고등보통학교 동맹 휴교 주도
활동 시기/일시 1928년 10월 5일 - 박세영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0월 선고
활동 시기/일시 1935년 2월 27일 - 박세영 동경공소원에서 징역 2년 6월 선고
몰년 시기/일시 1943년연표보기 - 박세영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3년연표보기 - 박세영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28년 - 광주고등보통학교 5학년생 이경채 퇴학 처분
출생지 전라남도 광주군 광주읍 양림리
학교|수학지 광주제일고등학교 - 광주광역시 북구 독립로237번길 33[누문동 144]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

[정의]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광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박세영(朴世英)[1910~1943)은 전라남도 광주군 광주읍 양림리[지금의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에서 태어났다. 광주고등보통학교[지금의 광주제일고등학교] 재학 중에 동맹 휴교를 단행하였고, 지속적인 휴교 파동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활동 사항]

1928년 6월 광주고등보통학교 5학년생 이경채(李景采)가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검거되어 기소되자 학교 당국은 이경채를 퇴학시켰다. 이에 광주고등보통학교 5학년생들이 일본인 교장 시라이[白井]에게 복학을 요구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게 되자 2·3·4학년생들도 적극 참여하여 300여 명의 학생들이 동맹 휴교를 단행하였다.

박세영은 1928년 6월 16일 정동화(鄭東華), 이만동(李萬童), 윤승현(尹昇鉉), 김부득(金富得) 등과 함께 「광주고등보통학교 생도 일동 통고문」이라는 제목으로 동맹 휴교에 대해 "광주고등보통학교의 노예교육 정책 탄압에 대한 최후의 비명이며, 학교 당국의 배후에 경찰 등 절대 세력이 있지만 우리의 배후에는 오직 학부모형 여러분이 있을 뿐"이라는 호소를 담은 유인물 400통을 등사하여 배포하는 등 적극 노력하였다.

1928년 6월 20일에도 「집행본부 경과보고」라는 제목으로 "이 투쟁은 광주고등보통학교와 전라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전 조선, 전 세계로 전개되어야 할 것이니 우리의 생명이 계속될 때까지 싸우자."라는 취지의 유인물을 60통 배포하는 등 투쟁하였으나, 오히려 학교 측은 1928년 6월 27일 정동화 등 27명은 퇴학시키고, 4학년생인 박세영 등 281명은 무기정학을 시켰다.

박세영은 지속적인 휴교 파동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일제 경찰에 붙잡혀, 1928년 10월 5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출판법」, 「보안법」 및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등으로 징역 10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일본 도쿄[東京]로 가서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日本勞動組合全國協議會) 조직에 관여하면서 항일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32년 10월에 재차 붙잡혀 모진 고문을 받았다. 1935년 2월 27일 동경공소원(東京控訴院)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43년 12월 28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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