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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화동 각화마을 기우제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4424
한자 角化洞角化-祈雨祭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의례/제
지역 광주광역시 북구 각화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정혜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민간신앙
의례 시기/일시 가뭄이 극심할 때

[정의]

광주광역시 북구 각화동 각화마을에서 가물 때 비가 내리기를 기원하며 지내는 제사.

[개설]

각화동 각화마을 기우제는 가뭄이 극심할 때 하늘에 비가 오기를 빌며 올리는 임시제(臨時祭)이다. 농사를 근본으로 삼았던 우리나라는 풍년과 흉년을 모두 자연의 순리에 맡겨 왔으며 하늘에 의지해 왔다. 농민들이 두려워하는 것 중 하나가 비가 내리지 않는 가뭄이었다. 하늘에서 비가 내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인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기에 천신(天神)과 지신(持身), 산신(山神)을 생각하게 되었다.

[연원 및 변천]

각화마을에서는 1959년 음력 7월 가뭄이 극심해 문화동 인근의 농민들이 두암동 군왕봉[무제등]에서 기우제를 지내기로 합의하였다. 기우제 비용으로 각 호당 50원씩 갹출하여 기우제를 준비하였다. 기우제를 지낼 때 화주와 제관의 금기와 몸가짐은 당산제를 모실 때보다 더 엄하다. 기해년에 가뭄이 온 이유에 대해서 마을 주민들은 신성한 군왕봉 정상이 명당으로 소문이 나면서 누군가 그곳에 몰래 묘를 썼기 때문으로 판단하였다. 농민들과 여자들이 앞장서서 군왕봉 정상을 파헤치자 양림동 최부자집 모친 것으로 보이는 명정(銘旌)이 나왔다. 이에 격분한 주민들은 준비해 간 오물을 사방에 뿌린 후 산을 내려왔다. 산을 내려오자마자 곧바로 비가 쏟아졌다고 한다. 그 후 파묘(破墓) 문제로 소송이 불거져 기우제를 주관하였던 제관이 파출소에 불려가 조사를 받는 등 곤욕을 치렀다고 한다. 그러나 긴 가뭄 끝에 단비가 내렸기에 기우제의 덕을 본 각화마을 하성대의 주도로 기우제를 지낸 제관과 화주를 위로하는 행사를 갖기도 하였다.

[절차]

기우제의 순서는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유교식 제의 절차로 '분향 → 진설 → 강신 → 헌작 → 배례 → 독축 → 소지 → 헌식'의 순이었다고 한다. 정갈하게 한복을 입고 갓을 쓴 제관들이 동서남북 방향에 비를 내려주길 바라는 배례를 하고, 천제에게 비는 기우제문을 간곡하게 읽은 다음, 헌식으로 돼지머리를 땅에 묻고 산꼭대기에 불을 피웠다.

[현황]

1980년대 후반에 농업용수의 해결을 위해서 국가에서 재정을 지원하고 개인들의 노력을 합해 관정(官井)을 판 뒤로 물 걱정이 사라졌다. 이런 이유로 기우제는 더 이상 지내지 않고 추억 속의 행사로만 기억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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