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100658
한자 元曉
영어공식명칭 Wonhyo
이칭/별칭 설서당,설신당,소성거사,복성거사,화쟁국사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종교인
지역 경상북도 경산시
시대 고대/삼국 시대/신라
집필자 방용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617년연표보기 - 원효 출생
출가|서품 시기/일시 631년경 - 원효 출가
활동 시기/일시 648년 - 원효 황룡사에서 수도
몰년 시기/일시 686년연표보기 - 원효 사망
출생지 원효 출생지 - 경상북도 경산시
활동지 원효 활동지 - 경상북도 경주시
성격 승려
성별

[정의]

삼국 시대 경산 출신의 승려.

[개설]

원효(元曉)[617~686]는 속성이 설(薛)씨, 아명은 서당(誓幢)이고, 제명(第名)은 신당(新幢)이라 하였다. 시호는 화쟁국사(和諍國師)이다. 태어날 때부터 총명하여 따로 스승이 없었으며, 15세 무렵에 출가했다. 의상(義湘)과 더불어 당나라에 유학하려던 중 깨달음을 얻고 돌아와 스스로 ‘소성거사(小性居士)’ 혹은 ‘복성거사(卜性居士)’를 칭하며 불교 대중화에 애썼다. 황룡사(皇龍寺)·분황사(芬皇寺)는 물론 자신의 생가(生家)를 헌납한 초개사(初開寺) 등에 주석하면서 『금강삼매경론소(金剛三昧經論疏)』,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 『화엄경소(華嚴經疏)』 등을 저술하여 국제적인 위상을 떨쳤다.

[활동 사항]

원효의 할아버지는 잉피공(仍皮公)[적대공(赤大公)]으로 알려져 있고, 아버지는 신라의 17관등 중 제11위인 나마(奈麻) 관등의 담내(談㮈)[담날(談捺)]이다. 신라 6두품 가문 출신으로 추정된다. 13세기 후반까지도 적대연(赤大淵) 옆에 잉피공의 사당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어 정치·사회적 위상이 높은 가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의 「원효불기(元曉不羈)」에 따르면 원효압량군(押梁郡) 남쪽의 불지촌(佛地村) 율곡(栗谷) 사라수(裟羅樹) 아래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원효가 태어난 인연으로 마을을 ‘불지촌’이라 하였는데, 현재의 경상북도 경산시 압량읍 신월리 혹은 자인면 일대에 해당한다. 출가한 이후 자신이 태어난 집을 ‘초개사(初開寺)’로 고쳐짓고, 태어났던 밤나무 옆에도 절을 짓고 ‘사라사(裟羅寺)’라 하였다.

원효는 15세 무렵에 출가하였으나 스승을 특정하지 않고 두루 수행하였으며, 스스로 깨달았다고 한다. 다만 『삼국유사』에는 낭지(朗智)와 혜공(惠空), 보덕(普德) 등에게 불법을 배웠다는 단편적 기사가 전해진다. 초개사에 주석할 때 명망이 높아 지방관의 추천으로 황룡사의 백고좌회(百高座會)에 참석할 수 있었으나, 주류 불교계의 반대가 심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의상과 당에서 유학하던 중 깨달음을 얻고 돌아왔으며, 요석궁(瑤石宮) 공주와 혼인하여 설총을 낳았다. 이후 스스로 ‘소성거사’ 혹은 ‘복성거사’를 자처하며 파격적인 불교 교화에 나섰다. 광대들이 가지고 노는 큰 박으로 도구를 만들어 이를 ‘무애(無碍)’라 하면서 가지고 놀며 불교의 교리를 쉬운 노래로 만들어 전했다. 입으로 부처의 이름을 외우고 귀로 부처의 가르침을 들으면 성불할 수 있다는 믿음을 전파하여 ‘나무아미타불’을 외는 소리가 끊이지 않을 만큼 불교 대중화에 공을 세웠다.

한편, 『삼국유사』에는 원효가 황룡사·분황사에 주석하면서 불경을 연구하고 저술 활동에 매진하였던 흔적이 보인다. 또한 원효와 관련된 설화는 『삼국유사』의 「낭지승운보현수(朗智乘雲普賢樹)」, 「사복불언(蛇福不言)」, 「의상전교(義湘傳敎)」, 「이혜동진(二惠同塵)」, 「낙산이대성관음정취조신(洛山二大聖觀音正趣調信)」, 「광덕엄장(廣德嚴莊)」 등에서 확인된다. 원효는 만년에 이르러 경주의 고선사(高仙寺)에 주로 주석하였으며, 686년 3월 30일에 혈사(穴寺)에서 70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사상과 저술]

원효의 교학은 흔히 화쟁(和諍)사상으로 손꼽히며, 서로 대립하는 다양한 학설과 이론을 조화롭게 소통시키고 더 높은 차원으로 화합한다는 특징을 지닌다. 그의 사상은 대표적인 저술 중 하나인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에 서술되어 있는데, 한국 불교의 가장 큰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화쟁은 일심(一心)과도 이어지는데, 인간은 누구나 불성을 가지고 있으며, 마음의 근원[一心]을 되찾는면 누구든지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에 따라 마음의 근원을 되찾아 모든 차별을 없애고, 만물이 평등하다는 것을 깨우쳐 자비(慈悲)의 마음을 구현한 세계가 정토(淨土)라고 설파하였다.

현재까지 알려진 원효의 저술은 100여 부 250여 권이 넘는 방대한 분량에 이른다. 이 가운데 『법화경종요(法華經宗要)』, 『대혜도경종요(大慧度經宗要)』, 『금강삼매경론소(金剛三昧經論疏)』,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 『화엄경소(華嚴經疏)』, 『열반경종요(涅槃經宗要)』, 『무량수경종요(無量壽經宗要)』,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이장의(二障義)』, 『중변분별론소(中邊分別論疏)』 등이 현전하는 대표적 저술로 평가된다.

[묘소]

원효는 686년 3월 30일에 혈사에서 입적하였는데, 설총이 유골을 빻아 소상(塑像)으로 만들어 분황사 금당(金堂)에 안치했다고 한다.

[상훈과 추모]

원효는 신라 십성(十聖) 중 한 명으로 추앙받았다. 신라 애장왕(哀莊王)[재위 800~808] 때 후손인 설중업(薛仲業)이 고선사에 서당화상비(誓幢和尙碑)를 건립하였으며, 비편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고려 명종(明宗)[재위 1170~1197] 때에는 분황사에 화쟁국사비(和諍國師碑)를 건립하였으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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