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1006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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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全伯英 |
영어공식명칭 | Jeon Bagyeong |
이칭/별칭 | 파계,문평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경산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위은숙 |
[정의]
고려 후기 경상북도 경산 출신의 문신.
[개설]
전백영(全伯英)[1345~1412]은 1371년(공민왕 20) 문과에 급제하였다.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걸쳐 주로 간관으로 활약하였다.
[가계]
전백영의 본관은 옥산(玉山)[경산(慶山)], 호는 파계(巴溪), 시호는 문평(文平)이다. 등과록에 따르면 할아버지는 전억령(全億齡), 아버지는 전명도(全明道)이며, 어머니는 남원 양씨로 양배(楊培)의 딸이다. 그러나 후대에 건립된 신도비에는 할아버지가 전객령(典客令)을 지낸 전문주(全文柱), 아버지는 판밀직사 상호군(判密直事上護軍) 전의룡(全義龍), 외할아버지는 월성 최씨(月城崔氏) 집의(執義) 최원우(崔元祐)로 기록되어 있다.
[활동 사항]
전백영은 정몽주(鄭夢周)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1371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1375년(우왕 1) 정언(正言)으로서 우헌납 이첨(李詹)과 함께 친원 정책을 펴던 이인임(李仁任), 지윤(池奫) 등을 탄핵하는 상서를 올렸으나, 도리어 지영주사(知榮州事)로 좌천되었다가 하동으로 유배되었다. 1390년(공양왕 2)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를 거쳐, 1392년(태조 1) 조선이 건국되자 간의(諫議)에 임명되었다. 1396년(태조 5) 개국공신 정희계(鄭熙啓)의 시호 문제로 인해 파직되었다가 다시 간관으로 복직하였다. 1397년(태조 6) 서북면 선위사(西北面宣慰使)로 임명되어 성을 쌓을 만 한 곳을 점검하였다. 1398년(태조 7) 풍해도 도관찰출척사(豊海道都觀察黜陟使)에 임명되었다. 1399년(정종 1)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1400년(정종 2)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에 올랐으며, 다시 경상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401년(태종 1) 노비 변정도감 제조(奴婢辨正都監提調)와 경상도 도관찰출척사, 1404년(태종 4) 승녕부윤(承寧府尹)을 지냈다. 이어 하정사(賀正使)에 임명되어 세자 책봉을 청하기 위해 명나라를 다녀왔다. 1405년(태종 5)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를 거쳐 예조판서에 임명되었으며, 1406년 경기도 도관찰사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었다. 1412년(태종 12) 국왕에게 청하여 늙고 병들었다 하여 고향인 경산현으로 낙향하였다.
[학문과 저술]
전백영의 행적을 엮은 『파계실기(巴溪實紀)』가 1996년에 간행되었다.
[묘소]
전백영의 묘소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상원리 산233에 있다.
[상훈과 추모]
전백영이 1412년 세상을 떠나자 조정에서 문평(文平)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후손들이 1965년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상원리 박실마을에 박곡서당(樸谷書堂)을 중건하였다. 1989년에는 박곡서당 앞에 ‘정헌대부 예조판서 지의정부사 문평공 파계 전선생 신도비(正憲大夫禮曹判書知議政府事文平公巴溪全先生神道碑)’를 건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