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100684
한자 李光後
영어공식명칭 Lee Kwanghu
이칭/별칭 비현(丕顯),매헌(梅軒)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광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64년연표보기 - 이광후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92년 - 이광후 임진왜란 창의
활동 시기/일시 1633년 - 이광후 자인현 복현 청원
관련 사건 시기/일시 1637년 - 자인현 복현
몰년 시기/일시 1643년연표보기 - 이광후 사망
추모 시기/일시 1700년 - 이광후 향현사 배향
추모 시기/일시 1927년 - 남천서당 건립
출생지 이광후 출생지 - 경상북도 경산시 남산면 상대리 지도보기
묘소 이광후 묘소 - 경상북도 경산시 남산면 지도보기
성격 의병
성별

[정의]

조선 후기 경상북도 경산 출신의 의병.

[개설]

이광후(李光後)[1564~1643]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켰으며, 자인현(慈仁縣) 복현(復縣)을 주도하였다.

[가계]

이광후의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비현(丕顯), 호는 매헌(梅軒)이다. 아버지는 증 참판(參判) 이몽천(李夢天), 어머니는 교수(敎授)를 지낸 전춘(田春)의 딸 곤양 전씨(昆陽田氏), 할아버지는 부호군(副護軍)을 지낸 이기(李璣), 증조부는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지낸 이자상(李自商), 부인은 감찰(監察)을 지낸 이인상(李麟祥)의 딸 전의 이씨(全義李氏)이다.

[활동 사항]

1564년(명종 18) 당시 경상도 경주부의 속현(屬縣)이었던 자인현 대처동(大處洞)[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 남산면 상대리]에서 출생하였다. 5세 때 아버지 이몽천으로부터 『소학(小學)』을 구전으로 전수받았다. 하루는 아버지의 외우(畏友)였던 장현광(張顯光)이 이광후의 명석함을 본 후 “후일에 오도(吾道)의 표준이 될 것이다”라고 칭찬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동생 이창후(李昌後)와 함께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1588년(선조 21)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3년 간 시묘살이를 했으며,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상례(喪禮)와 장례(葬禮)를 치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곽재우(郭再祐) 휘하에 종군하여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는 동생 이창후와 함께 곽재우를 도와 화왕산성(火旺山城)을 방어했다. 이광후가 활동할 무렵 경주부의 속현이었던 자인은 주읍(主邑)인 경주로부터 적지 않은 수탈을 당하였다. 이에 이광후를 필두로 한 자인현 사족들은 경주부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복현을 추진하게 된다. 이광후는 1633년(인조 11) 김응명(金應鳴)·이창후 등을 비롯해 고을 사람 300여 인을 이끌고 상경하여, 정부에 복현을 청원하였다. 복현 청원은 1637년(인조 15) 결실을 맺어 비로소 자인현감이 파견되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났는데, 이듬해 초 정부가 청나라와 강화를 맺었다는 소식을 듣고, 북쪽을 향해 통곡하며 비분강개 했다고 한다.

[묘소]

이광후의 묘소는 경상북도 경산시 남산면 대당산(大堂山) 아래에 있다.

[상훈과 추모]

1696년(숙종 22) 자인현 사림들은 복현에 공이 있는 이광후김응명·이창후를 제향하기 위하여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 남산면 하대리 삼성산 아래에 향현사(鄕賢祠)를 건립하기로 결의하였다. 향현사는 1700년 완성되었지만,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철폐되었다. 1927년 사림의 공론으로 세 사람을 다시 기리기 위하여 남천서당(南川書堂)을 건립하였다. 남천서당은 이후 남천서원(南川書院)[경상북도 경산시 용성면 덕천1길 39]으로 승격되었으나, 현재는 김응명만 제향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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