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2008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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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白初月 |
영어공식명칭 | Baek Chowol |
이칭/별칭 | 백인영,백학명,백도수,동조,백최승,백의수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함양군 |
시대 |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재현 |
출생 시기/일시 | 1878년 2월 17일 - 백초월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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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6년 - 백초월, 명진학교 교장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 백초월, 한국민단부 민단부장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7월 - 백초월, 항일신문 『혁신공보』 발간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11월 25일 - 백초월, 보성학교 시위계획에 대한민족 대표로 추대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백초월, 독립자금 모집 및 청년 파견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 백초월, 3.1운동 1주년 기념시위 관여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3월 - 백초월, 일본 도쿄에서 체포된 후 경성지방법원으로 이송 |
활동 시기/일시 | 1939년 - 백초월, 마포포교소에서 탈출한 신도의 봉천행 화물열차 사건으로 체포 |
몰년 시기/일시 | 1944년 6월 - 백초월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86년 - 백초월, 건국포장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백초월, 애국장 추서 |
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50년 - 백초월 유해 분실 |
출생지 | 경상남도 고성군 영오면 |
거주|이주지 | 영원사 -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 953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혁신공부 발간 및 배포|독립운동자금 모집 |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영원사 출신 승려이자 독립운동가.
[가계]
백초월(白初月)[1878~1944]의 본명은 백인영(白寅榮), 아명은 백학명(白學明), 족보상에는 백도수(白道洙)이다. 백초월은 출가 승려로서 법호는 초월(初月), 법명(法名)은 동조(東照)이다. 백최승(白最勝)·백의수(白義洙)로 불리기도 하였다.
[활동 사항]
백초월은 13세에 함양군 마천면에 있는 영원사로 출가하여 불문에 입문한 뒤 1916년 명진학교(明進學校) 교장을 지냈다. 1919년 4월 경성중앙학교에서 한국민단부(韓國民團部)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민단부장으로서 자금 모집 활동을 하였다. 1919년 7월에는 김재운(金在雲)·박윤(朴允) 등과 함께 항일신문 『혁신공보(革新公報)』를 발간하였다. 또 청년들의 독립군 및 상해임시정부 가입을 위하여 전라남도 천은사 주지 하용하(河龍河)를 통해 독립자금을 모았다. 군자금으로 길림성 독립군에 청년 11명, 상해임시정부에 6명을 보내기도 하였다.
백초월은 다시 군자금을 모집할 목적으로 국가채권 발행 계획에 관여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1919년 12월 2일 이도흔과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20년 3월에는 일본 유학생들이 주도한 3·1운동 1주년 기념시위에 관련되었다는 죄목으로 도쿄에서 잡혀 경성지방법원으로 이송되었다. 이때 모진 고문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풀려났지만 이후 광인 행세를 하며 친일 승려 규탄 활동과 일심교(一心敎)를 제창하기도 하였다.
1939년에는 백초월이 머물러 있던 마포포교소에서 탈출한 한 신도가 만주로 가는 봉천행(奉天行) 화물열차에서 ‘대한독립만세’라 적은 일이 발각된 사건과 관련하여 일본 경찰에 잡혔다. 판결문이 없어 형기는 알 수 없지만 이후 마포형무소, 대전형무소를 거쳐 청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사망하였다.
[묘소]
백초월은 청주 금천동 형무소 공동묘지에 묻혔다가 6.25전쟁 때 유해가 소실되어 현재는 묘소 위치를 알 수 없다.
[상훈과 추모]
백초월에게는 1986년 건국포장이 수여되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