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3007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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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吉通 |
영어음역 | Gim Giltong |
이칭/별칭 | 숙경(叔經),월천(月川),문평(文平)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제천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정제규 |
[정의]
조선 전기 문신.
[개설]
김길통(金吉通)[1408~1473]과 관련된 유물로 보물 제716호로 지정된 「김길통 좌리공신교서(金吉通 佐理功臣敎書)」 1첩이 있다. 1981년 3월 18일 지정되었으며, 현재 충북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공신 교서란 공이 있는 신하에게 왕의 명을 받들어 공신도감(功臣都鑑)에서 발행하는 공신 임명 증서를 말하는데, 이 교서는 성종이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 데 도와준 신료를 공신에 임명하고 그에 상응하는 녹을 내린 것을 기록한 문서이다. 이 문서는 4등에 임명된 숭정대부 행호조판서(崇政大夫行戶曹判書) 김길통에게 내린 것이다.
[가계]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숙경(叔經), 호는 월천(月川). 아버지는 좌찬성(左贊成)에 증직된 김효례(金孝禮)이며, 어머니는 보성 오씨(寶城吳氏)이다.
[활동 사항]
김길통은 권근(權近)[1352~1409]의 문하에 들어가 배우고 삼각산(三角山)에서 성삼문(成三問)[1418~1456]‚ 박팽년(朴彭年)[1417~1456]‚ 하위지(河緯地)[1412~1456]‚ 김시습(金時習)[1435~1493]‚ 남효온(南孝溫)[1454~1492]‚ 이석형(李石亨)[1415~1477] 등과 교유하였다.
1429년(세종 11) 사마시에 합격하고 1432년(세종 14) 식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갔다. 이후 삼사(三司)와 세자시강원의 관직을 거쳐 집현전 학사로 뽑혔고, 1436년(세종 18) 진잠 현감(鎭岑縣監)이 되었다. 1440년(세종 22) 사간원 우헌납에 오르고 이어 이조 정랑·사헌부 장령·성균관 사예를 거쳐 1451년(문종 1) 지승문원사와 판종부시사가 되고, 우사간 대부·황주 목사·첨지중추원사·전주 부윤을 지냈다.
1460년(세조 6) 사헌부 대사헌을 지낸 뒤 황해도·전라도의 관찰사, 예조와 형조의 참판에 이어 1462년(세조 8) 9월 1일 한성부 윤(漢城府尹)에 임명되었다. 1470년(성종 1) 6월 한성부 판윤을 거쳐 호조 판서를 지냈다. 사육신이 화를 입을 때 도끼를 가지고 상소하였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자 책을 모두 불사르고 경기도 이천시 신둔면 수남리(水南里)에 들어가 은거하였다.
[학문과 저술]
시문을 모은 『월천집(月川集)』 4권 2책이 있다. 김길통은 세조의 왕위 찬탈 과정에 반대하며 자신이 지은 시편을 스스로 불살랐으나, 뒤에 후손들이 다른 사람들과 나눈 시와 전라도 관찰사로 나가서 지은 시 몇 편을 모아 1649년(인조 27) 책을 만들었다. 이때 후손 김정화(金鼎華)가 중심이 되어 남은 시편을 더 수습하였으나, 정식으로 간행되었는지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1785년(정조 9) 후손 김도철(金道喆) 등이 활자본으로 간행하였다.
현존 규장각 소장본은 활자본과 필사본 두 종류로 1904년(고종 41) 이후 김익검(金益儉) 등이 다시 간행한 것이다. 특히 1785년을 전후하여 후손 김성후(金聖垕)[1683~1755]가 세조 때의 일을 기록한 「계유실록(癸酉實錄)」은 병자호란 중에 잃어버렸으나, 후손의 집에 일부 남아 있던 것과 김종직(金宗直)[1431~1492]‚ 이맹전(李孟專) 등의 후손 집에 남아 있던 것을 토대로 복원한 것이다.
문집에 전하는 시는 대부분 전라도 관찰사로 있을 때 각 역(驛)의 관사에 머무르며 지은 것들로 현달한 관직에 있으면서도 시골에 묻혀 사는 선비와 같은 삶의 자세를 잘 보여 준다. 이 외에 사육신 등과 나눈 시들을 통해 그의 기상을 엿볼 수 있다.
[상훈과 추모]
성종이 즉위하는 데 세운 공으로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에 월천군(月川君)으로 책록되었다. 시호는 문평(文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