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3009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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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禹德淳 |
영어음역 | U Deoksun |
이칭/별칭 | 단운(檀雲),우연준(禹連俊)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북도 제천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구완회 |
[정의]
일제 강점기 제천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본관은 단양(端陽). 호는 단운(檀雲), 이명은 우연준(禹連俊). 아들로 우대영(禹大榮)을 두었다.
[활동 사항]
우덕순(禹德淳)[1879~1950]은 어려서 상경하여 잡화상을 경영하면서 독립 협회 등 애국 계몽 운동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04년(고종 41)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연초 행상을 하다가 안중근·이범윤 등과 만났다. 그곳에서 교민들이 중심이 되어 주 2회씩 발행하면서 항일 운동의 본산 구실을 하던 『대동공보(大東公報)』의 집금 회계원으로 일하였다. 안중근과 함께 의병 부대 중대장으로서 경흥·회령 일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다가 체포되기도 하였다.
1909년(순종 3) 일본이 한국을 침탈하는 과정을 목격하고 분개하던 중 『대동공보』를 통하여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안중근, 조도선, 유동하 등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에 모여 살해하기로 모의하였다. 10월 26일, 우덕순은 채가구역(蔡家溝驛)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기다렸으나 기차가 그냥 통과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역에서 기다리던 안중근에게 살해되자 우덕순도 공범으로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다시 하얼빈·치치하르·만주리(滿洲里) 등지에서 교육·종교 사업에 종사하면서 독립운동에 힘을 기울였으며, 해방 후에는 헤이룽장 성(黑龍江省)의 한인민단(韓人民團) 위원장으로 아들 우대영과 함께 동포 피난민의 본국 수송에 진력하였다. 귀국 후 1948년에는 대한국민당(大韓國民黨) 최고위원으로 정치 활동을 하면서 건국 사업에 이바지하였다. 1950년 9월 26일 6·25 전쟁 중 인민군에게 처형되었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 거사를 앞두고 “만났도다. 만났도다. 원수 너를 만났도다”로 시작되는 「거사가(擧事歌)」가 전하는데, 평생 만나고자 하였던 원수인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니 이는 시작에 불과하며 일본인을 차례로 죽이겠다는 강한 적개심을 읊은 시이다.
[상훈과 추모]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