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3012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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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藥令市 |
영어음역 | Yangnyeongsi |
영어의미역 | Herbal Drug Market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
유형 | 지명/시설 |
지역 | 충청북도 제천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안상우 |
[정의]
충청북도 제천시에 있는 한약재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시장.
[개설]
약령시는 한약재의 유통과 관련하여 보건·의료적 기능과 지역 경제를 이끌어 온 원동력으로서 경제적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20세기 전반에 새로운 약령시가 다수 개설되었는데, 이미 조선 효종 때 개설되었다가 성쇠를 계속한 대구, 원주, 전주를 비롯하여 제천, 개성, 평양, 진주, 대전, 함흥 등에 약령시가 개설되었다.
제천 약령시는 주변에 풍부한 한약재 자연 채취 및 재배 생산지를 끼고 있어 한약재 수집을 전문으로 하는 기능도 동시에 수행하고 있다. 산지 중심이던 기존의 한약재 시장이 서울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지만, 산지 중심의 약초 시장인 제천 약령시가 서울 다음으로 많은 유통량을 점하고 있다. 그 이유는 제천 약령시가 한약재 수집을 전문적으로 하는 수집 시장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제천 약령시는 대한제국 말 엽부터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민간 상업 시장이 뿌리내린 이후 관인 제천 약령시로 자리 잡았다. 『조선일보』 1935년 10월 28일자에 ‘제7회를 맞이하는 제천 약령시는……’이라는 기사로 보아 늦어도 1929년에 공식적으로 제천 약령시가 개최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1928년 11월 12일자 『중외일보』에 따르면 제천시에 약시(藥市)가 개설되는 이유로 ‘해륙 산물 집중’을 들고 있다. 이는 제천시의 지리적 이점을 잘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기사 내용 가운데 처음에는 충주시에 약령시가 설치될 예정이었으나, 시의 부단한 노력으로 경합 끝에 제천에 약령시가 신설되었다고 하고 있다.
[관련 기록]
다른 지역의 약령시가 대부분 여타 지역에서 생산된 약재의 중간 거래 장소에 머물렀다면, 제천의 경우는 약재의 채취와 재배를 위주로 한 생산지 중심의 약재 시장이 형성되었다.
단양 군수로 있던 이황의 제자 황준량(黃俊良)[1517~1563]이 조정에 보낸 상소를 검토해 보면 제천의 약재가 다양하고 우수할 뿐만 아니라 산출량도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명종실록(明宗實錄)』 권22, 명종 12년 5월 7일(己未)]. 또한 『여지도서(輿地圖書)』의 제천 물산(物産) 현황을 보면 봉밀(蜂蜜), 송심(松蕈), 자초(紫草), 복령(茯苓), 신감초(辛甘草), 방풍(防風) 등의 약초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들 약초의 거래 또한 활발하게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뛰어난 약초 생산지라는 이점을 바탕으로 근대에 들어 제천에 약령시가 개설될 수 있었던 것이다.
[변천]
개설 후 중일 전쟁, 태평양 전쟁, 해방 후 남북 분단에 의해 외국 약재 수입이 어려워지면서 국산 약재 시장의 성장이 부각되었으며, 그 가운데 약초 생산지라는 이점을 가진 제천 약령시가 가장 두드러지게 발전하였다.
일제 강점기 제천의 약령시는 중앙동에 있었고, 점포가 대략 10개 정도의 수준에서 시작되었는데, 물량이 많아지면서 약 25개로 늘어나기도 하였다. 1933년 중앙동 복개공사로 지금의 화산동으로 이전하였는데, 당시 점포수는 69개 정도였다.
이후 다른 지역의 약령시는 계속되지 못하고 쇠퇴와 소멸을 거듭하였으나 제천 약령시는 계속 성장하여, 대규모 소비 시장을 끼고 있는 서울약령시장 다음으로 큰 규모를 가지고 있다.
[의의와 평가]
제천 약령시는 조선 후기에 형성된 생산지 중심의 약초 집산지를 기반으로 1929년에 재개되어 80년 넘는 전통을 자랑한다. 그간 다수의 약령시가 설치되었으나 계속되지 못하고 소멸한 데 비해, 제천 약령시는 생산지 중심의 특수 시장으로 지속적으로 발전해 왔으며 현재까지 제천약초시장으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