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물
-
용담1동의 마을 변화는 급격히 일어나, 도시환경의 변화 못지않게 이동 인구도 많아져 이곳에서 용담1동 토박이를 찾아 옛 이야기를 듣는 것은 불가능한 일처럼 여겨졌다. 오래 살았다는 사람들이 대체로 30년 안팎이었다. 고작해야 1970년대 이후 이야기나 듣게 되는 셈인데, 대부분 책자를 통해 습득한 용연 이야기나 제주향교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다. 그러다 용담1동에 전설이...
-
신옥년은 10살 때 일본으로 건너가서 13년을 일본에서 살았기 때문에 일본에서 혼인을 했다. 시댁은 래물이라 불리는 제주시의 사수동 지역이었지만 시댁 식구들이 일본에 살고 있던 같은 교포였다. 큰오빠의 올케가 래물 출신으로 시댁은 올케의 집과 앞, 뒷집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시댁 쪽에서 올케에게 신옥년이 ‘얌전해 보인다’고 중매를 부탁해서 열아홉에 혼인을 하게 되었다...
-
신옥년이 일본으로 처음 간 것은 열 살 때였다. 그리고 13년을 살다 귀국했다. 부모와 작은오빠는 모두 용담1동에 살고 있었지만 큰오빠와 고모네, 작은아버지 딸과 아들네가 일본에 살고 있어서 모친이 ‘석달 증명’(30일용 비자로 이해됨)을 하여 어머니와 일본을 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때 제주와 일본을 왕래하던 배는 군대환, 복목환, 경성환, 신길환 등이 있었다고 한다....
-
신옥년이 해방 후 귀국한 지 얼마 안돼서 4·3을 맞았다. 1947년 3·1절 행사로 시작된 4·3을 그는 명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사람이 사람을 직접 죽이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2차 대전 때에 미국이 일본을 습격할 때도 폭탄으로 습격했기 때문에 직접 사람을 죽이는 모습보다는 판자집들이 불타는 영상이 오히려 자리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4·3이...
-
신옥년과의 이야기는 용담동 옛 지경들에 대한 기억에서부터 시작하였다. 신옥년의 기억을 빌리자면 해방 후까지 용담동에는 집들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간간히 한천까지 이어지는 길가에 상점들만이 있었다고 한다. 현 서문시장 인근에도 집이 거의 없었고, 서문시장 위로는 거의 소나무밭이었는데, 시신을 묻는 묘지들이 그곳에 위치해 있었다고 한다. 한두기 근처나 부러리 근처 서문시...
-
바다를 끼고 있는 만큼 용담1동의 어업 활동도 꾸준히 이루어져 왔다. 용담동 사람들은 한두기 포구와 다끄내 포구를 이용해 바다로 나가 고기잡이를 했다고 한다. 김성원에 의하면 한두기 어부들은 제주의 다른 지역과 달리 농사와 뱃일을 겸업하지 않았다고 한다. 해녀들도 있었는데, 용두암 근처에서 물질을 하며 살았다고 한다. 지금도 나이 드신 분들 중에는 물질을 했던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