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7A0301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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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 구산동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윤정아 |
구산동마을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커다란 느티나무이다. 보호수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마을 할아버지들의 작지만 소중한 쉼터가 되어주는 나무그늘을 시원하게 만들고 있다. 햇볕이 내리쬐는 한여름 구산동마을을 찾아가면 느티나무 아래 모여 담소를 나누는 장면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실제로 마을에서 할아버지들을 만나 마을에 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듣고자 할 때, 따로 약속을 하지 않아도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느티나무 아래에 가면 할아버지들을 만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중 마을의 토박이로 늘 푸른색 트럭을 끌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나타나며 마을일과 집안일을 돌보는 임필수 할아버지를 만나 구산동마을에서 살아온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 보았다. 할아버지는 지금도 마을 청년들과 함께 마을의 대소사를 관장하고 있었다.
[간이학교에 다니던 시절]
임필수 할아버지의 이야기 중 가장 흥미롭고도 놀라운 사실은 구산동마을에 있었다는 간이학교 이야기였다. 할아버지는 구산간이학교 9회 졸업생으로, 학교에 다니던 시절의 생생한 기억들을 자연스레 풀어 놓았다.
구산간이학교는 일제강점기 구산동마을에 자리 잡고 9년을 유지하다 문을 닫을 뒤 1944년 문상국민학교[현 문상초등학교]로 승격되어 지금의 진천군 문백면 사양리에서 문을 열었다고 한다.
할아버지 집에 있는, 낡았지만 그 모습은 뚜렷하게 남아 있는 구산간이학교 마지막 졸업생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보노라면, 일제강점기 제복을 입고 공부를 했을 간이학교 학생들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구산간이학교를 처음 들어간 것은 할아버지가 9세 정도 되었을 때로, 일제 치하에서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매우 어려웠던 시절이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당시 일본 순사들의 눈치를 보느라 늘 질서를 지키며 학교에 다녔다는 이야기도 해 주었다. 특히 흥미로웠던 것은 ‘애국반’에 관한 이야기였다. 구산간이학교에 함께 다니는 아이들끼리 ‘애국반’을 조성하여 아침에 함께 모여 학교에 갔다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구산간이학교에 다니던 시절을 아주 재미있던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었다. 간이학교가 문을 닫으면서 찍은 사진을 액자에 걸어 놓은 것을 보고, 사진을 어떻게 소장하게 되었는지 물어 보았다.
할아버지와 함께 소학교를 다녔던 동기생은 모두 15명이었다. 그 중 한 사람이 유일하게 사진을 한 장 가지고 있었는데, 보존 상태가 좋지 않아 할아버지에게 의논하러 왔기에, 사진관에 가서 손도 보고 확대도 했다. 그러고는 마을에 위치했던 구산간이학교의 추억을 잊지 않기 위해 15명의 간이학교 출신 동기생들이 함께 사진을 나누어 가졌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구산간이학교에 대해 무척이나 애착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특히 일본인 교장선생님의 이름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모습에서 더욱 그런 느낌을 많이 받을 수 있었다.
“후지고토라고, 교장이 후지고토여. 일본 교장. 선생님들은 다 여기 사람이구. 한 명이 다 가리키고 그랬었어.”
지금은 소박하고 조용한 마을이 되었지만, 구산동마을에서 늘 시끌벅적했던 구산간이학교는 마지막 졸업생인 임필수 할아버지를 비롯한 15명의 졸업 동기생들 마음속에서는 영원히 잊혀 지지 않는 소학교로 남아 있었다.
[소나무 기름 짜기]
당시에는 먹을 것이 없어 늘 배가 고프던 시절이었는데, 특히 힘들었던 것이 학교 공부 대신 하던 소나무 캐는 일이었다고 한다. 당시 8~9세 정도밖에 되지 않는 초등학생들도 학교에 가서 1시간 공부를 마치면 구산동에서 좀 떨어진 만뢰산으로 올라가서 소나무 캐는 일을 했단다. 하필이면 왜 소나무를 캔 거냐고 물어 보자 할아버지는, “솔나무 캐서 기름 짜서, 일본놈들 병기로 핸다고 해서…….”라고 말해 주었다.
이처럼 어린아이나 어른 할 거 없이 일본을 위해 노동력을 착취당했던 예전 우리의 가슴 아픈 이야기도 할아버지의 온화한 미소 속에서 어린 시절 개구쟁이들의 추억 이야기로 바뀌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늘 마을에서 아이들을 몰고 다니는 개구쟁이였다고 한다.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밥도 제대로 못 먹었지만 남의 집 고구마도 훔쳐 먹고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며 즐겁게 어린 시절을 보낸 이야기를 해 주었다.
“뭐, 점심 콩깨밥이라구 모를껴, 꽁깨밥 먹구, 또 거 만리산[만뢰산]에 가서, 한 번 가면 시간이 4시, 5시 돼. 5학년 때. 그럼 뭐 먹을 것두 없구. 여 시방 상지고개 있자너. 거가서 고구마 훔쳐 먹구 그랬지 뭐. 참, 학생들이.”
할아버지는, 당시에는 생활이 어려워 늘 먹을 것이 부족하고 힘든 생활이었지만, 그래도 동심이 있었기에 친구들과 늘 즐겁고 재미있는 생활을 했다고 너털웃음을 터트린다.
[『소학』을 배우던 샛골 글방]
구산동에 위치했던 구산간이학교가 초등학교로 승격되어 사양리로 이전하자 마을에서 학교를 다니던 아이들 중 대부분은 학교에 갈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애국반을 조성하여 형, 누나, 동생들과 문상국민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고 한다.
현재의 초등학교 역할을 하던 구산간이학교와 문상국민학교를 다니기는 했으나, 할아버지는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중학교에 진학할 수 없었다. 하지만 문상국민학교에서 진천중학교를 못 가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고등과를 운영해서, 다행히 그곳에서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때는 인저 진천중학교 댕기는데, 우리는 고등과가 있었어, 문상핵교 고등과, 중학교 못 들어가는 사람들은 거기서 고등과에 댕겼거든, 그건 2년 졸업이여, 그건, 2년, 그리고 글방에 댕겼지, 뭐 또.”
할아버지는 그렇게 중학교에 갈 형편이 못 되었던 학생들이 다녔던 문상국민학교 고등과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가 자연스레 내구마을 샛골에 있었던 글방 이야기를 꺼냈다. 구산동은 얼핏 보기에 작은 마을로 보이지만, 할아버지 말에 따르면, 마을이 번성했을 때는 200여 호가 단합도 잘 되고 늘 시끌벅적한 마을이었다고 한다.
이런 가운데 내구마을 샛골이란 곳에 작은 글방이 하나 있었다고 한다. 상산학교를 2년 다닌 후 졸업을 하고 다음 과정으로 진학할 수 없었던 할아버지는 이 마을 글방에서 공부를 했다. 70여 년이 지난 일이라 할아버지도 당시 글방에서 어떤 내용을 배웠는지 기억하지 못했고, 이 때문에 더 이상은 세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할아버지의 기억에 따르면 글방에서 5~6년 정도 『소학(小學)』도 배우고 글도 배웠다고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마을 글방은 6·25전쟁이 일어나면서 문을 닫았다. 당시 마을 사람들 또한 전쟁을 피해 피난을 가야 하는 상황이었고, 구산동마을이야 그나마 안전한 곳이기는 했지만, 진천 지역 전체가 전쟁을 피할 수 없던 격전지였기 때문에 마을에서는 더 이상 글 읽는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고 한다.
[정보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