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005T040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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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郡內面 德柄마을-生産과 流通-産業別 構成 |
이칭/별칭 | 덕저리,떡저리,덕병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덕병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준 |
[산업별구성]
덕병리는 진도의 대표적인 갯벌이 있는 어촌마을이었다. 무안과 목포의 낙지잡이 전문가들이 와서 낙지를 잡아갈 정도였다. 고막, 바지락을 캐고, 운저리(표준어로는 문절망둑이 맞으나 이 지역에서는 운저리라 부름)을 잡아 읍내 장에 팔고 반찬을 하기도 했다. 일제시대 덕병에서 용인으로 잇는 원을 막았다.
그리고 2000년대에 덕병을 둘러싼 마을 한의와 내리를 막는 방조제가 완공되어 2005년부터 간척지에서는 가경작을 하고 있다. 방조제가 막히기 전에 한의마을에서는 김 양식을 많이 하였으며, 염전도 있었다. 염전이 가장 활발했던 마을이었다.
덕병리는 군내면에서 월가리 다음으로 큰 마을이었으며, 농지가 많아 분토마을, 한의마을에서도 덕병에 와 땅을 얻어 농사를 지었다. 당시에는 800여 평의 땅만 있어도 부자였으며, 마을에서 땅이 가장 많았던 사람은 30마지기를 가진 지주였다.
덕병리는 고두산252.2m), 금골산, 도암산의 산줄기로 둘러싸여 있어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아 농사짓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물을 가두기 위해서 둠범을 파서 농사를 지었다. 식량이 떨어지는 봄철이면 새꺼리를 내서 생활을 하고, 가을이면 일을 해주고, 얻어온 쌀을 이자를 쳐서(한 가마니를 빌려오면 한 가마니 반으로 갚았다) 변재를 해야 했다. 농사가 없는 가구는 부자집에 가서 타작을 해주고 밥도 얻어먹고 품삯을 가져와 아이들을 먹이고 가르쳤다. 그리고 겨울이면 새끼를 꼬거나 가마니를 짜서 팔았으며, 일부는 마을 인근 한의염전과 덕병염전에 고용되어 염전을 손질하기도 했다.
바다와 갯벌이 있기는 했지만 일부 삼중망을 이용해 고기를 잡고, 화랑게와 뻘떡게, 고둥을 잡기도 했다.
1980년대 한의에서 전두까지 막았으며, 전두에서 나리 큰제방은 1990년대에 막아졌다. 나리방조제가 조성되면서 덕병리 주민들은 호당 평균 4,500평씩 60여 농가가 가경작을 하고 있다. 간척지가 조성되면 일시 위탁경작을 거쳐 가경작, 분양이라는 절차를 거친다. 가경작은 일종의 농지 '다짐기간'으로, 염기를 제거하면서 경작의 가능성을 가늠해보는 기간이다. 나리간척지는 덕병마을 외에 한의, 용인, 대사, 나리마을들이 가경작을 하고 있다. 덕병리에 농사를 짓는 기계로 콤바인 3대, 트랙터 10대, 이앙기 16대를 보유하고 있다.
특별한 생산조직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농사를 짓기 위해 품앗이를 하고 있다. 일손이 부족하기 때문에 일손을 얻기 위한 방편으로 반드시 일을 도와주는 조건으로 '조건부 품앗이'를 하고 있다. 소득면에서는 논보다는 밭이 더 좋다. 쌀농사는 한 번 짓고 실패하면 끝나지만, 밭은 고추,배추 등 다양한 대체작목이 가능하다. 덕병에서는 과거에 30여 농가가 수매에 참여할 정도로 담배농사를 많이 지었다. 2006년에는 2농가가 6담보의 담배농사를 짓는다. 덕병에 월동배추나 대파가 상업작물로 재배되기 시작한 것은 20여년 되었으며, 대량재배는 15년 정도 되었다. 이들 작물들은 모두 가락동 중매인들에게 밭으로 팔린다. 진도의 기온이 육지에 비해서 5도 정도 높기 때문에 한 겨울에도 밭에서 작물이 자랄 수 있어, 거리가 멀기는 하지만 경쟁력이 있다. 특히 해남보다 늦게 시작해 연작 피해가 적고 질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대파농사과정
1. 상자를 이용해 못자리를 만든다(2~3월).
2. 검은 비닐을 씌우고(멀칭작업) 대파 모종을 옮겨 심는다(4월).
3. 물을 주고 약을 치며 관리를 한다(5~11월).
4. 흙으로 돋아준다(5~11월).
5. 겨울에 수확을 한다.
간척이 이루어지기 전 덕병리는 투석식 석화 양식과 김 양식, 낙지와 바지락 그리고 꼬막과 소라 등 맨손 어업이 이루어지는 어촌마을이었다. 어촌계를 중심으로 10㏊의 양식어업 면허지를 운영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