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005T080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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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智山面 禿峙마을-特性-마을의 位相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윤선 |
[마을의 위상]
지산면 인지리는 지산면의 소재지 마을이다. 진도의 7개 무형문화재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무형문화재의 본산이라고 할만하다. 직접적으로 관련된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는 남도들노래, 진도씻김굿을 비롯해, 전라남도지정 무형문화재인 진도만가가 해당되고, 간접적으로는 강강술래, 다시래기 등의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와 진도북놀이 등의 전라남도지정 무형문화재가 해당된다. 직접적으로 관련되었다는 것은 해당 무형문화재의 본거지가 지산면 인지리라는 뜻이고 간접적으로 관련되었다는 것은 해당 무형문화재의 본거지는 아닐지라도 지정 인간문화재나 해당 종목의 예능성이 인지마을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뜻이다.
진도의 민속예능 관련 무형문화재가 7종인 점을 감안하게 되면, 거의 모든 무형문화재 종목이 인지마을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진도를 거론할 때, 민요,민속의 고장이라고 하고, 그중에서도 지산면을 그 핵심이라고 하는 이면에는 인지마을의 민속문화적 전통과 위상이 전제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만큼 진도 전체의 민속 문화적 전통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치거나 영향을 받은 마을이라는 것이다. 특히 1960년대 무형문화재 지정기와 더불어 크게 활약했던 박병천, 조공례 등은 지산면 인지리의 위상을 전국에, 나아가 세계적으로 널리 알리는데 일조한바 크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전통이 대대로 세속 되고 상속되어 온 이면에는 박씨 무가라는 진도 전통 당골의 맥락과 신치선에 의한 판소리 보급, 설재천, 박팽년 등의 민요 전승력이 크게 작용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전통적으로 민속문화를 잘 계승하고 발전시켜 온 인지마을의 위상은 진도의 민속 문화를 견인하는 ‘대표성’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대표성에는 크게 두 가지 특징이 전제되어 있다. 하나는 뚜렷한 재능을 가진 핵심적인 인물들이 이 마을에서 태어나거나 기거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외부의 문화와 끊임없이 접목하면서 변화를 시도해 온 마을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소재지로써의 지리적 위치가 상당한 역할을 한 것으로도 보인다. 하지만 다른 면소재지와 비교해보면 단순한 지리적 위치만으로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예를 들어 인근 석교리[십일시리]는 임회면의 소재지이고 또한 10일장이 서는 주요 거점임에도 불구하고 인지리에 비해 민속문화적 전승력이나 확장력이 뛰어나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인지마을의 민속문화적 위상은 역사적인 맥락, 지리적인 맥락, 주요 인물들의 태생과 활동 맥락들이 상호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나타난 복합적 현상이라고 말 할 수 있겠다.
이같은 인지마을의 민속문화적 위상은 사실, 소포만의 경계와 목장면이라고 하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지산면의 전신인 목장면은 소포만을 경계로 진도의 동부 문화권과 변별되는 서부문화권역에 속한 지역이기 때문이다. 소포만의 핵심 지역인 지산면은 본래 내만(內灣) 끝 쪽에 있는 임회면에 부속되어 있었다. 한편으로 이것은 임회면과 지산면이 문화권적으로도 다르지 않음을 시사한다.
조선시대 중엽에는 지산면 관마리에 관마청을 두고 감목관(정6품)을 배치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목장면이라 칭하고 면치를 시작하게 된다. 그 이전인 백제시대에는 매구리현, 신라시대에는 탐진현에 속해 있었고, 조선시대까지 임회면 일대를 포함하여 목장면으로 불려왔다. 본래 목장면으로 불리던 지산면의 호수를 보면 1759년 여지도서에 488호, 1871년 진도읍 부지에 640호로 나온다. 이것은 임회면을 포함한 수치이므로 면적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인구수를 말해준다. 1813년에는 감목관제가 폐지되고 진도군수 치하에 편입되게 된다. 1895년인 고종32년에는 소포만의 끝에 있는 석교리 등을 임회면으로 이관하고 지력산의 이름을 따서 지산면이라고 칭하게 된다. 따라서 지산면 인지리의 위상은 지산면의 면치가 시작되는 구한말을 정점으로 확장되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된다. 결국 현재의 지산면은 약 100여 년 전에야 그 이름을 얻었다고 할 수 있으므로 인지리 마을의 역할도 이때부터 확장되었다고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지도에서 볼 수 있듯이, 인지마을은 진도의 서부문화권을 응집하는 거점이라고 할 수 있다. 석교리가 내만 가장 안쪽에 위치해 있어 진도 남부의 임회면 거점을 형성하는 것에 비교된다. 특히 이 지도는 간척 이전인 1970년대 이전을 나타낸 것인 바, 육로가 원활하지 못했던 점을 전제한다면 주로 소포만을 통한 문화적 교류가 이루어졌을 것임을 보여주는 증거가 되는 셈이다. 인지마을의 민요 전승에 가장 큰 원동력이 되었던 설재천(남도들 노래 예능보유자)과 박팽년, 그리고 소포마을의 김막금 등이 사당패 관련 노래들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었다는 점은, 특히 소포만을 통해서 목포 지역을 비롯한 외부 지역과 교류했다는 점에서 시사해 주는 바가 많다. 어쨌든 이런 지리적 조건 속에서 지산면의 소포리는 진도 서부문화권의 관문역할로, 인지리는 지산면의 소재로서의 중심지 역할로, 그리고 임회면 석교리는 십일장과 소포만의 가장 안쪽 나루로서의 문화와 물산의 집하지로 역할 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진도읍이 치소로써 진도문화의 중심지였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소포만을 통해서 진도 내부는 물론 진도 외부와 끊임없이 교류해온 지산면 인지리는 일제 강점기 이전부터 유랑패의 공연을 비롯해 관내 한량들의 놀이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남도들노래보존회 회장을 맡고 있는 김기순의 부친 김동암 등이 이러한 ‘판’을 만드는데 기여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유랑패들이 김동암 집의 마당에서 갖가지 곡예와 남도소리 등을 공연했기 때문이다. 또 지산면 길은리, 소포리 등의 상쇠들을 불러 모아 농악대를 차려서 지산면 일대를 순회하기도 하였다. 한국예총 진도지부장을 역임했던 서정재의 부친인 서복추는 지산면 오류리 출신인데, 김동암과 마찬가지로 소위 한량들의 판을 만드는데 크게 기여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서복추는 인지리로 이사를 오면서 당시 신치선, 이병기, 김득수 등을 불러 모아 남도소리를 배우게 하거나 연행했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이병기는 군내면 출신으로 진도판소리를 획기적으로 발전시켰다고 평가되는 인물이고, 김득수는 초창기부터 국협이나 국극단활동을 하였던 진도의 대표적인 국악인으로 훗날 고법 인간문화재로 지정된 바 있다. 신치선은 본래 협률사에서 활동하던 사람으로 명창 신영희의 부친이다. 의신면으로 이주했다가 다시 목포로 이주해 판소리계의 전설적인 인물인 안향련 등에게 깊은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특히 인지마을의 박병두는 판소리에 천재적인 소질을 지니고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아쉽게도 이른 나이에 요절하는 바람에 널리 알려지지 못하였다.
인지리에서의 유랑패의 영향은 일제 강점기 이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기도 한다. 이는 남도들노래 인간문화재로 지정되었던 설재천의 경우를 통해서도 증명된다. 설재천은 이 유랑패들의 노래를 가장 마지막으로 학습한 세대인 셈인데, 현재 전승되고 있는 노래들 중의 대부분이 설재천을 포함한 소수의 제보자들이 제보한 노래들이기 때문이다. 남도들노래 지정 당시 아쉽게도 타계한 박팽년 또한 전 시기의 민속문화적 자산을 조공례 등의 후대에게 전승한 중요한 인물에 속한다. 물론 훗날 이 노래들이 재창조되어 들노래와 다시래기 노래의 일부로, 또 강강술래 노래의 일부로 차용되게 되었던 것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특히 빼놓을 수 없는 인지마을의 민속문화사적 위상은 박병천 일가를 중심으로 한 진도씻김굿의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박병천의 부친인 박범준, 모친인 김소심 등을 비롯해 증조부인 박종기로 이어지는 진도씻김굿의 주류적 맥락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박병천과 혼인하여 일생을 무속인으로 보낸 정숙자는 본래 충청도 출신이지만 누구보다 인지리 혹은 지산면에 영향을 강하게 끼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진도만가에서 호상꾼에 의한 질베행렬은 사실 후대에 재창조된 민속문화 중의 하나인데, 이것을 기획 또는 안무했던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지산면 인지리는 소포만을 통해서 끊임없이 외부와 소통하면서 사당패 등의 유랑패 음악을 수용하였다. 또 진도 내부의 걸출한 명인들을 끊임없이 마을로 불러들여 민속문화적 전통이 계승되는 판을 마련하기도 했다. 아마도 이러한 전통 때문에 신치선 등의 외부인이 인지리 마을에 정착하여 신영희 등의 자녀를 두게 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보다 후대의 일이긴 하지만 지산면 갈두리 출신의 조공례가 인지리에 정착하게 된 것도, 또 다시래기 준예능보유자인 박광순이 지산면 고길리에서 인지리로 이주해 온 것도 단순한 우연만은 아니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진도 내부의 명창들을 불러 모아 강습을 하거나 판을 벌린 것도 민속문화의 수용역량으로 평가할 만 하다. 또 지산면 일대의 상쇠나 북수들을 불러 모아 면대 농악을 차리고 순회하기도 한 것은 내부적으로 민속문화를 응집시키고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