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700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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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 求- 密陽人- 壬辰倭亂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남도 밀양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정석태 |
[정의]
임진왜란 당시 나라를 구하는 데 앞장선 경상남도 밀양 사람들의 이야기.
[임진왜란과 밀양인]
임진왜란은 명나라의 멸망을 초래할 정도로 동아시아의 판도를 뒤바꾸어 놓을 정도의 대규모의 세계적인 전쟁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인 1555년의 을묘왜변과 비교하여 보면, 5,000여 명 규모의 왜구가 쳐들어온 을묘왜변 때에도 조선에서는 국가의 전력을 기울여 수습할 정도였는데, 20만의 정규군이 쳐들어온 임진왜란 때에는 조선이 비록 일본의 침략을 대비하고 있었어도 전력과 규모의 차이에 따라 초기 전투에서는 지리멸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당시 조선 당국에서는 오로지 일본군 침공 지역을 깡그리 태워 없애는 ‘청야작전(淸野作戰)’을 펴는 외에 전투다운 전투를 거의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에 따라 초기의 전장이 되었던 경상남도 지역은 거의 초토화가 되는 과정에 관련 자료가 거의 모두 타 버렸고, 그래서 초기의 전쟁 상황을 알려 주는 자료도 희소하다.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일본에서도 임진왜란 전쟁 초기의 상황을 알려 주는 자료를 발견하기 어렵다. 더욱이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임진왜란 이후 광해군 대에 정국을 주도한 북인 정권이 인조반정으로 몰락하면서 북인 정권에 의하여 편찬된 『선조실록』을 개수한 『선조수정실록』을 편찬하게 되었다. 『선조수정실록』을 편찬하면서 임진왜란 발발 초기 경상남도 지역에서 일어난 의병의 활동을 지우고 중앙정부의 역할을 부각시키는 과정에서 밀양을 중심으로 한 영남대로를 통한 초기 일본군의 진격 노선까지 왜곡되어 버리고 말았다.
밀양의 ‘작원관 전적비’와 ‘작원관 위령탑’ 등도 그중의 하나이다. 작원관(鵲院關)에서 황산잔도를 거쳐 동래로 나가는 영남대로는 사람 한둘이 겨우 통과할 수 있는 좁은 길이고, 많은 물자는 조선시대 내내 낙동강 수로를 통하여 남해 바다로 나갔다. 따라서 동래성으로 진격한 1만 7000여 명의 일본군 제1군이 황산잔도를 거쳐 작원관으로 들어오지 않았음은 실제 작원관을 답사한 사람이면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낙동강 수로를 진격 노선, 병력과 병참의 수송로로 택할 경우 낙동강 수로는 양쪽에 높은 산을 끼고 있는 협곡이기 때문에 느린 배로 올라올 경우 협곡 양쪽 산 위에서 불화살 등의 공격이 있게 되면 거의 대부분 소실되어 밀양까지 이동하기 어렵다. 이와 함께 밀양성은 밀양강[깊이 6~7m]이라는 천연의 해자를 두르고 있어서 조선에서 동래성 함락 이후 밀양성을 주요 방어 거점으로 할 경우 함락이 쉽지 않았을 것임도 영남대로를 수시로 왕래하였던 일본에서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영남좌도 감사와 병사 등은 오로지 ‘청야작전’에만 몰두하느라 일찌감치 밀양성을 버리고 팔공산으로 피신하였다. 그리고 박진(朴晉) 부사만이 양산성 가장(假將)[조선 시대에, 싸움터에서 어느 장수의 자리가 비게 될 경우 주장(主將)의 명령에 따라 임시로 그 자리를 대신하던 장수]을 나갔다가 돌아오면서 낙동강 일원에 있었던 세곡창 등을 소각하고 끝내는 밀양성도 소각한 채 밀양 산내의 석동으로 피신하였다. 따라서 임진왜란 때의 작원관 전투로 알려진 것은 인조반정 이후 서인 정권에서 『선조수정실록』을 작성하면서 끼워 넣은 왜곡된 역사 사실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밀양 지역에 전하여 오는 여러 이야기를 살펴보면, 일본군 제1군의 본진은 작원관으로 진격하지 않고, 밀양성을 우회하고 또 대규모 병력과 병참의 수송이 가능한 진격 노선을 확보하기 위하여 양산 원동의 어영산을 넘어 지금의 밀양댐 앞쪽으로 나와서 백마산을 지나 청도로 진군하고, 다른 한 부대는 도래재를 넘어 울산 좌병영을 공격하고 또 산내 석동으로 피신한 밀양부를 공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와 관련하여 밀양에서는 산내 출신 평민의병장 어초와(漁樵窩) 김유부(金有富)[1549~1621] 장군의 행적이 특히 돋보인다. 김유부에 대한 기록은 『어초와양세삼강록(漁樵窩兩世三綱錄)』 등 여러 자료들에 전하고 있다. 그리고 구전 자료도 많이 전하고 있다. 임진왜란의 초기 전투 상황, 일본군 제1군의 진격 노선을 포함한 밀양을 중심으로 한 초기의 전투 상황을 김유부 장군의 행적을 토대로 구명해 볼 필요가 있다. 이와 함께 현재 밀양의 지명에서조차 지워지고 ‘송백리’로 바뀌어 버린 ‘효자들’이었을 ‘효평(孝坪)’, 임진왜란 최초의 승전 현장인 ‘효평’이라는 지명도 다시 살려서 교육의 자료로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 ‘효(孝)’라는 글자는 자식이 부모를 업고 있는 모습을 글자화한 것인데, 실제 김유부 장군은 팔순의 노모를 업고 다니면서 전투에 임하였고, ‘효평’은 실제 행적을 염두에 두고 붙인 이름이기 때문이다.
[밀양인의 의병 활동]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 초기의 혼란이 지나자 밀양 지역에서는 생존권 확보와 향촌 사회 유지를 위한 의병 항쟁이 전개되었다.
첫째, 작원관 전투에 참여한 항쟁이다. 밀양박씨 박수(朴守)는 유백춘(柳伯春) 등과 의병을 이끌고 박진의 휘하로 참전하였다. 이후 울산 지역의 동천에서 태화강으로 올라오는 적선을 막았다. 정유재란 시기에는 곽재우의 휘하에서 활동하다 김응서(金應瑞)의 진으로 가서 활동하였다. 또 김유부도 처음에는 밀양에서 활약하다가 이어 경주와 울산 진영의 의병에 합세하여 전투에서 크게 이긴 바 있다. 김유부는 처음 일본군이 양산 원동의 내포(內浦)를 지나 어영산(魚嶺山)을 넘어 밀양으로 침입하자 산내 팔풍 쪽에서 추격하여 효평 지역에서 전투하여 성과를 올렸다. 이때 낙동강 왼쪽의 적을 300명 넘게 섬멸하였다고 한다. 효평에서 올린 전과를 밀양부사 박진이 순찰사의 진영에 보고하였다. 당시 김유부는 정병 300명을 이끌고 황산역으로 나와 산간 숲속에서 매복 작전으로 적을 견제하였다. 김유부가 효평을 지키니 밀양이 보존되었다고 평가되었다.
둘째, 석골사에서의 의병 항쟁이다. 석동은 작원관 전투의 패배 이후 박진 부사가 병사를 이끌고 주둔한 곳이기도 하다. 석동은 지리적 조건으로 일본군의 대군이 밀양을 침입하였을 때 밀양인의 피난처였다. 석동에서 향촌 수호를 위하여 밀양의 재지사족이 창의하였다. 임진왜란 초기 밀양성이 함락되자 호거산 아래 형제골에 피난하여 있었는데, 안정을 되찾자 지리적인 이점을 이용하여 산내면 삼락정의 대암 등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워 전공을 올렸다. 이때 창의를 주도한 가문은 여주이씨, 밀성손씨, 김녕김씨 가문 등 임진왜란 이전부터 밀양 향촌 사회를 이끌고 있던 재지사족들이었다. 창의를 주도한 사람들은 이경홍(李慶弘) 형제, 손기양, 김선홍 등이다.
[일본군에 맞선 의병장]
1. 밀양부사 박진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부사 박진은 읍성 방비를 점검한 다음 관내 군사를 몰아 동래성으로 달려갔지만, 왜적에게 밀려 관내 작원관(鵲院關)으로 후퇴하여 방어선을 펴고 고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의 제1군을 맞아 일전을 벌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왜적이 작원관을 끼고 산으로 올라와 옆으로 공격하는 바람에 많은 전사자를 내고 패퇴하였다. 종병탄(鍾柄灘)을 건너 밀양성으로 후퇴한 박진은 성내의 식량 창고 회내창(會內倉)을 비롯한 군기소(軍器所) 등에 불을 지른 다음 백성들을 피난시키고 달아났다. 읍성은 왜적에게 유린되어 성안에 있는 관아와 건물은 말할 것도 없고, 성 내외 백성들의 모든 재산까지도 사라지고 말았다. 이후 박진은 비록 밀양성을 방어하지는 못하였지만, 전투 경력과 비상시 방어 능력을 인정받아 경상좌도병사에 제수되었다.
2. 이경홍
『근재실기(謹齋實紀)』의 유사(遺事)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실려 있다.
“이경홍의 자는 백긍(伯兢), 호는 근재(謹齋)이다. 가정(嘉靖) 경자년[1540년(중종 35)]에 태어났다. 효성과 우애가 있고 성품이 방정 엄숙하였으며 학문이 정심하였다. 융경(隆慶) 경오년[1570년(선조 3)]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로부터 과거 공부를 그만두었다. 한강(寒岡) 정구(鄭逑),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 존재(存齋) 곽준(郭䞭), 대암(大庵) 박성(朴惺), 옥천(玉川) 안여경(安餘慶)과 도의(道義)로 교유하면서 돌아가신 아버지[이광진(李光軫)]의 별서(別墅) 금시당(今是堂)을 지키며 일생을 마칠 계획을 하였다. 신묘년[1591년] 봄 효행으로 천거되어 선원전참봉(濬源殿參奉)에 제수되었다. / 임진왜란 때 밀양부사 박진이 병사를 거느리고 이곳[석동(石洞)]에 주둔하자, 고을에 사는 근재 이경홍과 아우 진사 이경승, 오한(聱漢) 손기양(孫起陽)이 향병(鄕兵)을 불러 모아 함께 창의하였다[公諱慶弘字伯兢號謹齋 生於嘉靖庚子 孝友方嚴 學問精深 中隆慶庚午司馬 自此廢擧 與鄭寒岡逑金東岡宇顒郭存齋䞭朴大庵惺安玉川餘慶爲道義交 遵守先公別墅爲終老之計 辛卯春 以孝行薦 除濬源殿參奉 / 壬辰亂 府使朴晉領兵住札于此 鄕居李謹齋慶弘與弟進士慶承孫聱漢起陽募召鄕兵 俱倡義][『밀주지(密州誌)』 석동촌주(石洞村註)]”
밀양 출신 사명당 유정의 임진왜란 시의 공적은 전투 참전, 산성 축조와 복구, 강화 회담 주도 등이다.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으로 1593년 1월의 평양성 탈환 작전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으며, 1593년 3월 서울 부근 삼각산 노원평과 우관동 전투에서도 공을 세웠다. 이 일로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를 제수받았다. 1594년 4월부터 1597년 3월 사이에 적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의 4차례 협상 회담에 참여하였다. 1595년에는 장편의 상소문을 올려 전쟁에 대비하여 국력을 충실히 하는 방책을 건의하였다.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승려로서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의 벼슬을 하사받았다. 1604년 휴정이 입적하여 묘향산으로 가던 중에 왕명을 받고 일본과 강화를 맺기 위한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1605년 4월에 포로로 잡혀 갔던 조선인 3,000여 명을 데리고 귀국하였는데, 이때 왜군에 강탈당한 통도사(通度寺)의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되찾아 와서 건봉사(乾鳳寺)에 안치하였다.
4. 손인갑
손인갑(孫仁甲)은 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김면과 정인홍 휘하에서 중군으로 활약하다가 마진에서 사망하였다. 손인갑이 치른 전투는 무계 전투, 사원동 전투, 우지현 전투, 마진 전투 등이다. 임진왜란 초기에 많은 왜군을 죽여 크게 평가받았다고 한다. 선무원종일등공신에 올랐고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의의 및 평가]
밀양은 조선팔도에서 임진왜란으로 가장 혹심한 피해를 입은 곳 중의 하나이다. 동래성의 함락 이후 하룻길도 되지 않는 곳에 위치한 밀양은 곧바로 왜적이 밀려들어 와 피난도 하지 못한 채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고 말았다. 더구나 전란 초기 대응을 지휘해야 할 경상도감사와 경상도좌우병사, 경상도좌우수사가 군영과 군대를 버리고 달아나면서 동래성 함락 이후 첫 번째 방어 지점이 되었어야 할 밀양성은 도리어 방어할 주체에 의하여 소각되는 비운의 사태를 겪고 말았다.
영남대로의 제1로가 중심을 통과하고, 낙동강 수로의 출발지로서 조선 초기 성종(成宗) 때에는 이미 영남 제일의 도시, 인재와 물산의 풍부함에서 조선 제일의 도시 중의 하나로 성장하였던 밀양이 하루아침에 불바다가 되고, 오랜 기간 동안 폐허 속에 방치된 채 왜군(倭軍)과 명군(明軍)이 번갈아 주둔하던 전장(戰場)이 되고 말았다.
낙동강 수로의 출발지, 서울로 수송되던 세곡(稅穀) 수송의 출발지로서 이호창(耳湖倉)과 수산창(守山倉)을 위시한 응천강과 낙동강 곳곳에 세워졌던 세곡창(稅穀倉)에 쌓여 있던 세곡들, 적의 수중에 들어가면 군량으로 바뀔 그 많은 세곡들과 동래성 함락에 대비한 첫 번째 방어 지점으로 정하고 갖추어 두었던 많은 군기(軍器)들을 없애기 위한 밀양성 소각은 읍성의 세곡과 군기의 소각에만 그친 것이 아니었다. 밀양 영남루와 관아를 위시한 밀양성 내의 모든 건물들이 다 사라지고 말았을 뿐만 아니라, 건물들의 소실과 함께 번영을 구가하던 밀양의 화려한 문화도 한꺼번에 다 사라지고 말았다. 조선 초 밀양에 터를 잡고 한창 지역의 문화를 꽃피워 가던 밀양 향내 여러 명문가들의 피해 정도는 우리가 지금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심각하였다. 그 결과 각 문중의 문적(文籍)이 거의 사라지면서 조선 전기까지의 밀양은 현재로서는 거의 알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