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7000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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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洛東江- 秘境- 水路 |
분야 | 지리/자연 지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남도 밀양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정석태 |
[정의]
조선시대 경상도에서 가장 발달한 항구도시로서 밀양.
[내륙의 항구도시 밀양]
밀양 출신 대학자 김종직(金宗直)은 밀양 영남루(密陽嶺南樓)를 중심으로 한 밀양읍성의 풍물과 정서를 읊은 「응천죽지곡(凝川竹枝曲)」에서 “금동역 가 부들 풀은 바람에 한들한들, 마산항구 마름 풀은 물위에 둥실둥실[金銅驛邊蒲獵獵 馬山港口荇田田]”이라고 하였고, 또 “누각의 코앞까지 조수 밀려오려다가, 잠깐 사이 해문으로 되돌아가 가 버리네[咫尺樓前潮欲到, 須臾却向海門廻]”라고 하였다.
김종직이 여기서 말하는 ‘마산항구’는 창원시 바닷가의 마산항구가 아니다. 부북면 마암산(馬巖山)[마산(馬山)] 앞쪽 밀양강 일대는 남해 바다 조수가 늘 왕래하여 조수를 타고 바다로 출입하던 큰 배들이 남포(南浦)까지 가득 정박하였던 항구라는 본래 의미를 살려서 ‘마산항구’라고 한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재건한 밀양읍성 남문을 바다 가까운 곳이라는 뜻으로 ‘공해루(控海樓)’라고 했던 것도 김종직이 말한 ‘마산항구’, 곧 마암포구를 염두에 두고 그렇게 이름을 붙인 것이다.
조선시대에 발전한 도시들은 밀양처럼 내륙의 항구를 가진 곳이 많다. 이때의 항구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바닷가의 항구 해항(海港)이 아니라 내륙 강가의 항구 하항(河港)이었다. 한양은 여의도 건너편 옛 마포대교 자리 용산 자락 한강 가의 마포나루를 하항으로 개발함으로써 수로를 통하여 세곡과 물산을 하항으로 운송하여 한양도성과 중앙 조정이 유지될 수 있게 하였다. 조선팔도에서 운송된 세곡은 마포나루에서 그리 멀지 않은 광흥창(廣興倉)에 모두 모였다. 조선팔도의 물산이 마포나루로 모두 모여들었기 때문에 마포나루 주변에는 발달한 대규모 도회지가 형성되었다.
조선시대 밀양에는 밀양강의 마암포구에 버금가는 항구가 낙동강에도 두 곳 더 있었다. 바로 하남읍의 수산진(守山津)과 삼랑진읍의 삼랑진(三浪津)이었다. 수산진과 삼랑진은 조선시대에 이름 그대로 단순히 낙동강에 놓여 강 이쪽과 저쪽을 왕래하는 사람들을 건네주는 나루터만이 아니었다. 낙동강 하류 쪽에 위치하여 세곡과 물산 등을 강을 통하여 내륙 깊숙한 곳으로 운송하거나 남해 바다로 나가서 서해 바다를 거쳐 한양으로 운송하는 큰 배들이 왕래하고 또 정박하던 주요 항구 역할을 함께 하였다. 강에 있으면서 나루터의 역할도 겸하였기 때문에 수산진과 삼랑진이라고 한 것이었지, 실제는 낙동강 수로 운송의 주요 거점이었던 하항이었다. 이처럼 밀양은 읍성 바로 앞 밀양강 마암포구만이 아니라 외곽의 낙동강에도 수산진과 삼랑진의 두 항을 거느린 경상도에서 가장 발달한 항구도시였다.
[조선 전기 낙동강 수로와 수산진]
수산진과 삼랑진은 신라 때 가야 정벌의 주요 거점이 된 이래 거점 일대가 각각 수산현(守山縣)과 밀진현(密津縣)으로 발전하였다. 고려시대에 수산현과 밀진현은 밀성군(密城郡)의 속현이 되었지만, 여전히 이름을 잃지 않을 정도로 독자적인 문화권, 생활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나루로서만이 아니라 세곡과 물산의 주요 운송 거점인 하항으로서 지위를 계속 유지하였던 것이다. 특히 낙동강은 중하류 하상이 경사가 거의 없이 평형상태를 유지할 정도로 몹시 완만하여 상류 안동까지 배를 통한 물류 운송이 가능했기 때문에 두 곳은 일찍부터 하항으로 개발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경상남도 지방 세곡 운송은 처음에 김해 불암창(佛巖倉), 창원 마산창(馬山倉), 사천 통양창(通洋倉)으로 운송 납부하게 한 뒤 남해안과 서해안을 통해 경창(京倉)으로 해상운송을 하였다. 그러다가 1403년(태종 3) 5월 경상도 조운선(漕運船) 34척이 침몰하여 미곡 1만 석과 선원 1000여 명이 수몰되는 참사를 겪은 뒤로 해상운송에서 육상운송으로 방침을 변경하였다. 낙동강을 통하여 상주 낙동(洛東)으로 운반한 뒤 다시 육로로 계립령(鷄立嶺)을 넘어서 충주 경원창(慶原倉)에 모아 두었다가 남한강을 통하여 한양으로 운송하였다. 그러므로 조선 전기에는 수산진이 삼랑진보다 더욱 발달하였다.
수산진은 하남읍 수산리 옛 수산대교 자리에 있었다. 고대 이래 군사, 경제, 문화, 교통의 요충지로서 삼랑진과 함께 신라 때 가야 정벌의 전진기지로 삼은 곳이다. 강 건너편은 창원의 대산진(大山津)으로서 조선시대 자여도(自如道)와 연결되어 창원과 함안 등지로 통하였고,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하였기 때문에 임강원(臨江院)이 있었다. 특히 조선시대에 수산현은 밀양부의 속현이었지만 지방을 다니는 관료들의 접대와 세곡 및 물산 운송 등 여러 행정사무가 있게 되면서 수산현 관사 덕민정(德民亭)이 따로 설치되었다. 이처럼 수산진이 이 지역 낙동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독자적인 문화권, 생활권을 형성하였기 때문에 수산진 일대의 낙동강을 따로 수산강(守山江)이라고 하였다.
덕민정은 1450년(세종 30) 부사 이백상(李伯常)이 수산진 위쪽 바위벼랑에 창건하였다. 1463년(세조 9) 호조판서 조석문(曺錫文)의 건의로 수산제국농소(守山堤國農所)가 설치되고 1467년 수산제 증축을 통하여 연 1만 석의 수확을 올릴 수 있게 되자, 세곡과 함께 수확물을 보관하는 수산창(守山倉)이 확장되면서 수산진은 세곡과 물산 운송의 주요 거점 항구로서 크게 발전하였다. 이에 따라 관사의 확충이 필요하여 1538년(중종 33) 부사 장적(張籍)은 덕민정 서남쪽에 관사 누정을 세웠고, 1539년 부사 어득강(魚得江)은 단청을 한 뒤 누정 이름을 ‘남수(攬秀)’라고 하였다. 1543년 부사 박세후(朴世煦)는 덕민정 서북쪽에 다시 관사 부속건물 10여 칸을 증축한 다음 주세붕(周世鵬)에게 「남수정기(攬秀亭記)」를 받았다.
‘남수’라는 말은 당나라 이백이 여산(廬山) 오로봉(五老峯)을 두고 지은 시에서 “구강의 빼어난 풍광 거둬들이네[九江秀色可攬結]”라고 한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주세붕은 밀양 영남루와 촉석루를 포함하여 낙동강 본류와 지류에 위치한 누(樓)·정(亭)·당(堂)·대(臺) 총 17개 중 그 어느 것도 조망되는 풍광이 남수정에 비견될 것이 없다고 전제한 다음, 여산 오로봉이 구강의 빼어난 풍광을 모두 거두어 놓았듯이 남수정도 낙동강 산수의 빼어난 풍광을 모두 거두어 놓은 낙동강 제일 누정이기 때문에 ‘남수’라고 명명한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극찬하였다.
덕민정과 남수정은 창건 이후 관사로서 어떠한 변천을 겪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따로 남아 있지 않다. 더욱이 임진왜란으로 수산창과 함께 모두 소실되고 수산제도 파괴되어 국농소가 폐지되면서, 조선 전기 수산현과 함께 번성하였던 수산진 일대의 옛 모습을 자세히 알기는 어렵다. 대신 덕민정과 남수정에서 조망되는 주변 경관의 빼어남과 광활함으로 조선시대 내내 문인학자들의 사랑을 받아 지어진 많은 제영시들이 남아 있어서 덕민정과 남수정의 옛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지금 남수정에 김수인(金守訒)의 작품으로 걸려 있는 「남수정십이경(攬秀亭十二景)」도 그중 한 작품이다. 수산나루를 중심으로 남수정에서 조망되는 밀양시 하남읍에서 강 건너 창원시 대산면까지 낙동강 일원 광활한 지역의 경관을 제1경 ‘낙강상선(洛江商船)’, 제2경 ‘백산석봉(栢山夕烽)’, 제3경 ‘마봉낙조(馬峯落照)’, 제3경 ‘병산숙무(兵山宿霧)’, 제4경 ‘대산목전(垈山牧笛)’, 제5경 ‘사촌어등(沙村漁燈)’, 제6경 ‘용진율림(龍津栗林)’, 제7경 ‘갈전창송(葛田蒼松)’, 제8경 ‘모산취연(牟山炊煙)’, ‘농포하화(農浦荷花)’, ‘강시주점(江市酒店)’, ‘평교제월(平郊霽月)’의 ‘십이경’으로 나누어 읊었다. 「남수정십이경」 작품을 통하여 한때 세곡과 물산 운송으로 왕래가 빈번한 돛단배가 강에 가득하고 돛단배와 함께 몰려든 사람들의 활기가 넘쳐나던 수산진, 큰 항구로서 번성하였던 수산진 일대의 옛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수산현에는 수산진 외에 수륙 교통의 요충지로서 하남읍 명례리 용진강(龍津江) 하류 해양강(海陽江) 강가의 용진(龍津)이 있었다. 강 건너편은 김해의 뇌진(磊津)으로서 강가에는 고려시대 이래 해양원(海陽院)이 있었고, 주변 경관이 아름다워 고려시대 이래 문인학자들의 여러 제영시가 남아 있다. 지금은 해당 지역에 명례성당(明禮聖堂)과 낙주재(洛洲齋)가 있다.
명례성당은 경상남도 지역에서 가장 먼저 설립된 천주교회 본당이자 한국천주교 마산교구의 출발지이다. 1897년 순교자 신석복(申錫福)을 기념하기 위하여 신석복 생가 가까운 곳에 4칸짜리 작은 건물을 지은 것에서 출발하였다. 1928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기와로 된 성당으로 새로 지었다가, 1936년 태풍으로 무너지자 건물 잔해를 이용하여 1938년 축소 복원하였다. 초기 한국천주교회 건축양식을 엿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중요한 건물이다. 낙주재는 광해군 때 인목대비의 유폐에 항거하고 낙남한 이번(李𤄫)의 정사이다. 인조반정 이후 인조는 홍문관부제학에 제수하는 등 여러 차례 이번을 불렀지만 이번이 끝내 나오지 않자, 인조는 선전관에게 이번이 은거한 곳의 그림을 그려 오게 하고는 ‘낙주재(洛洲齋)’라는 편액을 직접 써서 하사하였다고 한다.
[조선 후기 낙동강 수로와 삼랑진]
삼랑진은 삼랑진읍 삼랑리 낙동강철교, 곧 삼랑진철교[삼랑진인도교, 일명 ‘콰이강의 다리’]가 세워진 자리에 있었다. 낙동강이 밀양강과 합류한 바로 아래쪽이다. 낙동강은 밀양강과 합류하기 전 하남읍 명례리에서 용진강 하류 해양강과 먼저 합류한 다음, 다시 밀양강과 합류하여 이곳에 와서 낙동강과 밀양강, 남해 바다에서 밀려온 조수의 세 물줄기가 하나로 된다고 하여 ‘삼랑(三浪)’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삼랑진이 낙동강 유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독자적인 문화권, 생활권을 형성하였기 때문에 삼랑진 일대의 낙동강을 삼랑강(三浪江)이라고 하였다. 바다처럼 큰물을 이룬 낙동강에 지는 노을이 유달리 아름다운 곳이기도 하다.
수산나루와 함께 신라 때 가야 정벌의 주요 거점이 된 이래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도 여전히 낙동강 수로의 주요 운송거점 항구이자 강 건너편 김해시 한림면 마사리와 마주하여 경상좌도 영남대로와 연결되는 나루로서 수륙교통의 요충지였다. 특히 산천의 경관이 아름다워 옛날부터 삼랑루(三郎樓, 三浪樓)라는 누정이 있었다. 고려시대 승려 원감(圓鑑)이 삼랑루에 올라 지은 시에 “모래섬 가 주점은 달팽이 껍질 늘어 논 듯, 물결에 뜬 돛단배 뱃머리가 춤춘다오[傍洲沙店排蝸角 逐浪風船舞鷁頭]”라고 한 것을 통하여 고려시대에 이미 상업이 발달한 수운의 요충지로서 번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 후조창(後漕倉)[삼랑창(三浪倉)]이 설치되면서 경상남도 지방 세곡과 물산의 집산지가 되었다. 경남 지방 세곡 운송은 1760년(영조 36) 경상감사 조엄(趙儼)의 건의로 다시 육상운송에서 해상운송으로 방침이 변경된 다음, 창원에 좌조창(左漕倉)[마산포창(馬山浦倉)]과 진주에 우조창(右漕倉)[가산포창(駕山浦倉)]이 설치되었다. 1766년 밀양에 후조창이 설치되어 밀양·양산·현풍·창녕·영산·울산·동래 등 7개 고을의 조세를 밀양부사 책임 하에 징수하고, 제포만호의 책임 하에 조선(漕船) 15척으로 한양으로 운송 납부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삼랑나루 일대는 낙동강 수로를 통하여 운송될 세곡과 물산이 모여드는 항구이자, 주변 고을의 조세를 징수하는 관아의 기능도 함께 가진 큰 도회지로 발달하였다. 1905년 삼랑진철교가 건설될 때까지 발전하였지만 근대문명과 함께 폐쇄되었다.
후조창은 1766년 밀양부사 김인대(金仁大)가 건물을 창건하였다. 낙동강 연안 7개 고을 조세를 조창(漕倉)에서 거두되 삼도수군통제영에 보내는 세곡은 별도로 보관하여 ‘통창(統倉)’이라고 하였다. 지금 삼랑진읍 삼랑리 하부마을 일대가 후조창 유지(遺址)이고, 통창골은 통창의 소재지였다. 1945년 해방 직후까지도 차소(差所)와 창고 등 일부 건물이 남아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철거되었다. 다만 조창산등이, 조창나루터, 지점거리, 선청(船廳), 통창골과 같은 지명이 남아 있고 마을 뒤편 고개 중턱에 조창에 관계하였던 부사와 관찰사 등 역대 관원의 유애비(遺愛碑), 선정비(善政碑), 불망비(不忘碑) 등 8기가 남아 있다. 이를 통하여 조선 후기 후조창 설치로 한때 세곡과 물산 운송으로 왕래가 빈번하던 돛단배가 강에 가득하고 돛단배와 함께 몰려든 사람들의 활기가 넘쳐 나던 삼랑나루, 큰 항구로서 번성하던 삼랑나루 일대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다.
고려시대 이래 삼랑나루 뒤쪽 후포산(後浦山)[뒷기미·뒷기뫼] 중턱에 있었던 삼랑루는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오우정(五友亭)으로 바뀌었다. 김종직의 문인 민구령(閔九齡)이 1510년(중종 5)경 세운 정자이다. 뒤에 고을 사림들이 민구령 형제의 우애와 덕행을 추모하여 정자 안에 오우사(五友祠)를 지었다. 오우사가 삼강사(三江祠)로 바뀌었다가 다시 삼강서원(三江書院)으로 바뀌었다.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자손들이 복원하였다가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1897년 후손들이 사당에 있던 자리에 집을 짓고 오우정이라고 하였고, 1979년 다시 규모를 확장하여 삼강서원이라고 하였다. 삼랑나루와 별개로 오우정 가까이에는 오우정나루가 있었고, 낙동강 가로 후포산을 돌아 뒷기미마을 가까이에는 뒷기미나루가 있었다.
삼랑진에서 낙동강을 따라 조금 내려가면 지금의 삼랑진읍 검세리 낙동강 가에 작원진(鵲院津)이 있었다. 거기서 남쪽으로 5리[약 1.96㎞] 아래에는 작원관(鵲院關)이 있어서, 교통 요지였을 뿐만 아니라 군사상 요충지였다. 그 맞은편이 김해의 어항 도요저(都要渚)이다. 도요저는 양산의 황산도(黃山道)와 연결되는 작원(鵲院)의 잔도(棧道)와 원(院)과 진(津)이라는 세 가지 기능을 함께 가진 고대 이래 전략상 요충지이자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의 주요 전적지이다. 작원관은 경부선 철도 건설 과정에 철거되고 나루도 없어진 채이고, 현재 4대강 사업 과정에서 건설된 자전거길을 따라가면서 옛 잔도 까치비리 작천(鵲遷)을 볼 수 있다.
[근대 이후 낙동강과 변화된 삼랑진]
삼랑진은 한말 후조창 폐지 이후 1905년 경부선 철도와 1906년 경전선 철도가 개통하면서 경부선 삼랑진역과 경전선 낙동강역, 그리고 신호소인 미전역 등 3개의 철도역을 가진 근대 철도교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경부선 철도 삼랑진역 주변 송지리에는 철도관사를 중심으로 근대 일본식 신시가지가 건설되었고, 후조창 터에 세워진 낙동강역 주변에는 경전선 철도를 통하여 사람과 물산이 집중되는 큰 도회지가 형성되었다. 1928년에는 삼랑진이 속한 하동면이 삼랑진면이 되었다. 하동면의 ‘하동(下東)’이 ‘하등(下等)’과 발음이 비슷하다고 하여 삼랑진역 이름으로 면의 이름을 바꾼 것이라고 한다. 1963년에는 삼랑진면이 삼랑진읍으로 승격되었다.
삼랑진읍은 1980년대 전후까지 철도를 통하여 부산이나 진주 쪽으로 이동하는 사람이나 물류가 거쳐 가는 우리나라 철도교통의 최대 요충지로서 번성하였다. 밀양시 삼랑진읍 출신 현대시인 오규원이 늘 자신을 ‘밀양 시인’이 아닌 ‘삼랑진 시인’으로 불리기를 바랐던 것은 철도와 함께 번성하였던 삼랑진읍에는 근대 이후 한때 밀양의 다른 지역과 차별되는 독특한 문화가 형성되었던 것을 시인의 예민한 감수성으로 느끼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1970년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된 이후로 전국이 고속도로로 연결되고 육로 교통의 중심이 철도에서 고속도로로, 그리고 고속철도 KTX로 점차 이동되면서 삼랑진읍은 이제 빠른 속도로 지나쳐 버리는 지방 중소도시의 한 작은 읍이 되어 있다.
삼랑진역과 낙동강역 주변에는 근대 철도 교통의 요충지로서, 관련 유적들이 산재해 있다. 우선 삼랑진역 구내에 있는 밀양 삼랑진역 급수탑은 1923년 세워진 근대 주요 문화유산 중 하나로서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다음 삼랑진역 주변 송지리에는 철도관사를 중심으로 조성되었던 근대 일본식 신시가지가 아직도 상당 부분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옛 철도병원은 1986년 헐려 지금 대형마트로 변하였고, 신사는 원불교유치원으로 변하였으며, 또 많은 건물들이 필요에 따라 개조되었지만, 아직도 여러 건물들과 잘 정돈된 가로등이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낙동강역에는 이 역에서 삼랑진역을 연결하는 경전선 선로가 단선으로 남아 있다. 1905년 단선으로 건설한 낙동강철교는 지금 ‘삼랑진인도교’라는 이름으로 인도 및 차도로 사용되고 있다. 1962년 복선으로 건설한 낙동강철교는 당시로서는 우리나라에서 한강철교 다음으로 긴 철교였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고 레일바이크가 운행되고 있다.
삼랑진의 낙동강을 통과하여 부산으로 연결되는 신대구고속도로의 낙동대교와 경전선 고속철도 KTX 운행을 위하여 새로 건설된 철로와 낙동강을 가로질러 놓인 낙동강철교가 옛날 낙동강과 밀양강이 합류하고 경부선 철도와 경전선 철도가 연결되던 수륙 교통의 요지로서 번성하였던 삼랑진의 옛 모습을 생각나게 한다.
[낙동강수로와 현대의 밀양]
최근 4대강 사업의 일환으로 낙동강만이 아니라 밀양강에도 자전거길이 조성되어 자전거를 타고 마암포구와 남포, 수산진과 삼랑진 일대를 여행할 수 있다. 자전거로 여행하는 사람들 가운데 조선시대 낙동강 수로의 주요 거점으로 번성하였던 하항 중 하나라고 생각할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냥 지나치지 않고 머물면서 살펴볼 수 있도록 자리마다 설명과 사진 등을 곁들인 안내판이 여러 곳에 설치되어야 한다. 수륙 교통의 주요 거점으로서 옛 모습과 역할, 그 주변 밀양강과 낙동강에 지금도 남아 있는 조선시대 이래 여러 유적들을 아울러 설명해 줄 수 있는 탐방의 기회가 자주 있어야 한다. 나아가 내륙의 항구도시로서 밀양을 널리 알릴 수 있도록 밀양강과 낙동강에 조선시대 황포돛단배를 띄워 부산으로 나가 보는 관광과 교육 프로그램도 있어야 한다.